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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폭력의 서사가 아닌, 폭력의 주체와 본질에 천착하는 연극- 극단 물속에서 책읽기, <트루 코메디True Comedy>, 연극평론가 백로라

연극평협 2024. 4. 19. 23:51

폭력의 서사가 아닌, 폭력의 주체와 본질에 천착하는 연극

- 극단 물속에서 책읽기, <트루 코메디True Comedy>

 

 

백로라(연극평론가, 숭실대 교수)

 

  극단 물속에서 책읽기<트루 코메디True Comedy>(김민중 작, 유수미 연출, 2023.11.7.-11.9, 민송아트홀 2)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한 가족해체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코메디를 표방한 공연 제목은 관객의 기대를 의도적으로 배반하기 위한 일종의 트릭으로 보인다. 웃음보다는 긴장과 공포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의 공식 참가작으로 아버지와 아들, 단 두 명의 인물만 무대에 등장하지만, 관객을 지루함에 빠뜨리지 않고 시종일관 팽팽한 극적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막이 오르면 속옷 차림의 아버지가 등장하여 빈둥거린다. 휴대폰을 보거나 골프 스윙 연습을 하고, 식당에서 일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식사 준비를 하라며 귀가를 재촉한다. 그러나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치며 전원이 꺼졌다 들어오는 등 불안한 분위기가 조성된 후 평범해 보였던 아버지의 일상에 변화가 일어난다. 연락이 거의 없었던 아들이 비를 맞은 채 집안에 들어오고 칠순 생일이라 들렀다며 골프채와 골프화를 선물로 준다. 아버지는 잠시 반가움을 표현하지만 사소한 문제로 신경질을 내거나 욕설을 하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폭언을 퍼붓는 등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어머니의 귀가를 기다리면서 아버지와 아들은 술을 마시고 아들은 아버지의 과도한 음주, 폭력, 불륜 등과 연계된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이 평생을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오히려 효도를 요구한다. 아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폭력을 가한 뒤, 뛰어내릴 듯이 창틀에 올라선다. 날이 밝고 아버지는 방에서 나와 엉망이 된 거실을 보고 놀란다. 바닥에 떨어진 가족사진을 제자리에 놓다가 아들이 18년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잠시 슬퍼하지만, 아내의 귀가를 재촉하고 컵라면을 찾으며 막이 내린다.

 

김민중 작, 유수미 연출 <True Comedy> ⓒ 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제공

 

  이처럼 극적 서사 자체는 그리 새로울 게 없어 보인다. 아버지의 음주와 폭력, 어머니의 무력한 굴종, 불안한 가족의 현존 등은 가족의 문제를 다룬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사적 모티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들 두 명만 등장하는 2인극의 경우, 캐릭터, 극적 사건, 갈등 상황 등이 어느 정도 예견되기에 기대감이 떨어질 수 있다. 여기에 두 인물이 술을 마시며 갈등을 조성하거나, 과거의 사건이 전체 서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극적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은 묘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것은 물론 다양한 연극적 장치 때문에 비롯된 것이겠지만, 무엇보다도 골프채임팩트 백의 활용에 힘 입은 바 크다. 이 연극에서 아버지는 골프 스윙 동작을 빈번하게 보여주는데, 극 초반에는 그것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일상적 동작처럼 보이지만, 그의 폭력적 성향과 행동이 노출되면서 폭력의 메타포가 된다. 골프채가 그 자체로 폭력의 도구를 의미한다면, 공기를 가르면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행위(동작)는 잔혹한 폭력 행위를 환기시키며, 골프채에 맞아 퍽퍽 소리를 내며 찌그러지는 임팩트 백은 피해자들의 신체적 훼손과 정신적 고통을 감각적으로 지각시켜준다. 그래서 아버지가 골프채를 휘두를 때마다 관객들은 폭력의 피해자와 유사하게, 심리적으로 위축되며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이 연극의 절정은 술을 마시던 아들이 아버지의 뻔뻔한 태도에 분노하여 골프채로 아버지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 장면에 이르면 폭력의 주체(가해자)와 대상(피해자)의 위치뿐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역할도 뒤바뀐다. 아들이 아버지를 골프채로 때리자, 아버지는 갑자기 옷에 소변을 보면서 아들에게 아빠 잘못했어요라며 어린아이처럼 용서를 구한다. 실제로 아버지가 기저귀만 차고 아들에게 매를 맞으며 아이처럼 비는 장면은 존재와 행위의 불균형함 때문에 그로테크스크하다는 느낌을 주면서 불편한 정서를 자극한다. 이와 관련하여, 극 초반에는 아버지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다가 아들이 등장한 이후로 점차 비현실적인 상황들이 펼쳐지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변화는 아들의 등장 직전, 갑자기 폭우와 함께 천둥 번개가 치면서 전등이 꺼졌다 들어오는 상황을 통해 예고된다. 결말에서 밝혀지지만, 무대에 등장하여 아버지와 갈등하는 아들은 사실상 오래전에 죽은 자이다. 따라서 그러한 아들의 출현은 죽은 자의 현존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조리하고도 비현실적인 상황임이 분명하다.

 

김민중 작, 유수미 연출 <True Comedy> ⓒ 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제공

 

   이러한 연출을 통해 이 작품은 폭력이나 가족해체의 문제가 아니라 부조리함그 자체를 전경화시킨다. 이것은 이 연극이 익숙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기존의 작품과 달리, 관객들에게 예기치 못한 정서적 충격을 안겨주게 되는 이유가 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연극에서 관객들이 느끼게 되는 불편함이나 불안감은 폭력적 행위를 목격하고 그 피해자를 연민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그보다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뭔가 이상하고, 그로테스크하며, 부조리하다는 느낌을 받는 데서 연유한다. 즉 이 연극은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여 결국 어린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던 아버지가 이제는 소변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늙어서 기저귀를 차고 있는 상황의 부조리함’, 더 나아가 아들은 죽고 아내와 딸도 집에 오지 않는 고립되고 소외된 삶을 살아가면서도 어떠한 성찰도 없이 여전히 골프채를 휘두르고 술을 마시며 컵라면을 찾는 아버지라는 인간 그 자체의 존재의 부조리함과 충격적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이것은 폭력의 서사가 아닌 폭력의 주체와 본질에 대해 사유하도록 하는 연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대사를 통해 과거의 사건을 환기시키고, 어느 순간에 아버지와 아들이 과거의 상황을 재현하도록 함으로써 현재와 과거가 중첩되어 기이하게 공존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던 장면 연출도 기억할 만하다. 다만 익숙한 표현 방법을 상징적 장치로 활용한 것은 옥의 티라 할 수 있다. 죽은 아들이 출현하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예고하기 위해 폭우와 천둥 번개, 정전 등의 장치를 활용한다거나 아들의 죽음을 암시하기 위해 가족사진을 활용하는 것은 상투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 또한 아버지의 음주와 폭력의 상관성 때문에 술 마시는 장면을 많이 배치한 것은 이해되나, 이 경우 모든 갈등의 원인이 술에서 비롯된 것처럼 비춰질 우려가 있다. 이 연극이 기존의 작품과 차별화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폭력의 서사가 아닌 폭력의 주체와 본질에 천착한 데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돋보일 수 있는 연극적인 표현 방법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해보면 좋을 듯하다. 마지막으로 공연시간 내내 강한 에너지로 관객을 흡인하면서 2인극 공연의 진정한 매력을 경험시켜준 배우들의 열연에 박수를 보낸다.

 

 

-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공식 참가작

연극 <True Comedy>

공연 일시 : 2023.11.07. ~ 11.09.

공연 장소 : 민송아트홀 2관 

작|김민중

연출|유수미

극단 물속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