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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존재론적 사유를 탈각한 부랑의 무언극 <날개>, 연극평론가 정수진

연극평협 2024. 2. 2. 13:11

존재론적 사유를 탈각한 부랑의 무언극

<날개>

 

정수진

 

‘이상李箱’은 한국 모더니즘을 환유하는 이름이다. 전위적이며 해체적인 문학적 실험을 거침없이 토해내던 천재 작가는 시대와 불화하다 스물여덟 살에 요절하였다. 그는 시, 소설, 수필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감각적인 글쓰기를 경주했다. 그의 문학작품은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의 불안과 갈등을 근대의 도시 풍경과 함께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대표작 <날개>는 자의식이 강한 주인공을 통해, 세계와 갈등하는 인물의 내면을 명징하게 포착해 낸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분명한 성취다. 

이상 원작, 박상협 각색&middot;연출 ⓒ 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제공

 

이상의 <날개>를 무언극으로?

 

극단 화담의 <날개>(이상 원작, 박상협 각색·연출, 민송아트홀 2관, 2023.11.11~11.12)는 원작 이상의 <날개>를 2인극 무언극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각색과 연출을 맡은 박상협은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 시기에 오랜만에 다시 <날개>를 읽고서, 골방에 틀어박혀 지내는 주인공의 모습에 동질감을 느꼈다고 한다. 대사 속에 의미를 담기보다는 “일상을 상상하며 느끼게 되는 감정선을 고스란히” 객석에 전달하고 싶어서, 작품을 무언극으로 각색했다는 것이다. 

관극 전에 프로그램을 읽으면서, 공연의 콘셉트가 너무 막연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주인공의 독백으로 전개되는 원작의 존재론적 사유와 해체적 글쓰기로 표현된 분열적 자아의 번민을 언어가 아닌 몸짓으로만 극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또한 안방에 붙어 있는 내실에 갇혀 있는 ‘나’가 다섯 번의 외출과 네 번의 귀가를 반복한다는 원작의 단조로운 동선을 한 시간 남짓한 공연시간 동안 어떻게 풍부히 무대화할 수 있을지도 회의적이었다. 사회와 단절된 채 안방 내실에 스스로를 유폐한 주인공의 무의식에 대한 진지한 접근 대신, 자칫 표면적으로 두드러지는 성적인 은유만 파편적으로 나열해 버리는 장면이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휘발된 삶의 패러독스

 

연극 <날개>는 환히 밝힌 무대로 관객을 맞이한다. 무대 하수 앞쪽에는 하얀 벤치가 놓여 있고, 뒤편 전면에는 이상의 방(하수)과 아내의 방(상수)이 보인다. 두 개의 방은 문 달린 옹색한 가벽 하나로 구분되어 있고, 이상의 방은 아내의 방의 반절 크기다. 아내의 방에서 이상의 방으로 갈 때에는 얕은 두 칸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며, 이상의 방에서 밖으로 외출하기 위해서는 아내의 방을 지나쳐야만 한다. 이상의 방에는 세간살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 바닥 위에 깔린 초라한 요와 작은 이불 하나뿐이다. 반면, 아내의 방에는 소박한 장과 거울 그리고 소반 하나가 있고, 연둣빛 베개와 꽃분홍색 이불이 잘 정리되어 있다. 벽에는 전통 옷걸이 횃대가 있고, 아내의 알록달록한 한복 몇 벌이 걸려 있다. 긴 직사각형 모양의 간유리창이 있는 미닫이 나무문을 통해, 아내의 방에서 외부로 출입할 수 있다. 집 밖으로 나오면 옥상을 상징하는 철제로 만든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높은 선반 하나가 자리한다. 

이상의 방에는 이상(전세기 분)이 객석으로부터 등 돌리고 누워 있다. 낡은 러닝셔츠, 줄무늬 트렁크 팬츠를 입고 구멍 난 검정 양말을 신은 민머리의 사내가 엉덩이와 아랫도리를 벅벅 긁으면서 늦잠을 자고 있다. 그 모습 어디에도 권태로운 일상과 불화하는 근대 지식인의 초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일상에서 쉬이 마주칠 수 있는 부랑아의 익숙하면서도 상투적인 모습만이 나열된다. 

연극 <날개>의 극적 서사는 원작의 서사적 흐름을 그대로 따른다. 이상과 이상의 아내, 남녀 배우 2명이 등장한다는 점 외에는 2인극이라 평할 만한 어떠한 극적 특징도 찾아보기 어렵다. 극은 주인공 이상의 행동을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문제는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 전세기의 연기가 시종일관 ‘일상적’이라는 점이었다. 일례로, 그가 작은 문을 통해 아내 방으로 가서 아내의 화장품 뚜껑을 열어 아내의 향을 느끼다가 자위를 하는 장면에서, 어떠한 ‘연극적인’ 기호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이국적인 센슈얼한 향기가 폐로 스며들면 나는 저절로 스르르 감기는 내 눈을 느낀다. 확실히 아내의 체취의 파편이다.”라는 원작의 문장에 스며 있는 감각적인 권태 이미지는 모두 휘발된 채, 관객들은 낯선 부랑아의 자위행위를 억지로 관음해야 하는 불쾌한 관극을 강요받을 뿐이었다. 

아내 역의 배우 정의진은 정제된 몸짓으로 여성 배우로서 감당하기 어려웠을 각종 성적인 장면을 묵묵히 감내했다. 옷걸이에 모자를 걸어 은유한 손님과 함께 방으로 들어와서, 세워놓았던 소반을 꺼내어 술상을 차리고 대접하는 장면에서도, 손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 집중력을 보였다. 그러나 배우의 노력만으로 입체적이고 다면적으로 역할을 창조하기에는 애초에 불가능했던, 평면적이고 보조적인 아내 역할이었다. 특히, 정의진이 2~3분 정도 계속 교성을 지르는 후반부 장면에서는, 문제적 장면을 고스란히 여성배우의 연기로만 해결한 안일한 연출에 적지 않게 당황하였다. 

이상 원작, 박상협 각색&middot;연출 ⓒ 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제공

 

무위無爲의 무언극

 

원작과 마찬가지로, 연극 <이상>의 마지막 장면도 옥상 위 주인공의 행동에 집중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계단을 숨차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행동과 공허한 표정만으로는 원작이 품고 있는 현실 초월 의지나 비상을 향한 욕망 등을 표현하기란 무리였다. 그저 무위에 가까운 피상적인 권태 속에 자멸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무기력한 주인공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철제 옥상 위에 팔 벌리고 서 있는 주인공의 행동이 관객들에게 어떠한 감흥도 불러일으킬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인칭 독백으로 기술된 소설을 무언극으로 각색한 공연 콘셉트가 문제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언극으로 탈바꿈시킬 때에는 원작에 담긴 존재론적 사유와 삶의 회의 그리고 탈출에의 욕망 등등의 주제의식을 담아낼 만한 혁신적 대안을 마련해두었어야 했다. 원작의 서사는 그대로 극적 서사로 받아들이고 대사만 소거해 버리는 방식으로는, 표피적인 반복 행위를 넘어서는 극적 행동을 추출하기란 불가능하다. 원작을 각색할 때는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오독誤讀을 넘어서는 새로운 기대지평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원작을 각색한 작품들에게 요구되는 단 하나의 가치이자 과제다. 이 점을 연극 <날개>의 창작진은 되새겨 보아야 한다. 

 

 

정수진

연극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우리 근대극 형성기에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들을 공부하는 중이다. 공저 학술서 『연극의 고전 다시 읽다』(한국연극학회 편, 연극과인간, 2023)와 희곡 에세이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테오리아, 2021)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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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공식 참가작

연극 <이상의 날개>

공연 일시 : 2023.11.11. ~ 11.12.

공연 장소 : 민송아트홀 2관 

원작|이상

각색·연출|박상협

극단 화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