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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화된 창작극 무대, 지역 연극의 가능성- 극단 장자번덕, <별>, 연극평론가 백로라

연극평협 2024. 3. 25. 18:04

차별화된 창작극 무대, 지역 연극의 가능성

- 극단 장자번덕, <>

 

 

백로라

 

지역 연극의 경우, 작가, 배우, 연출, 스태프 등 공연 제작을 위한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공연의 완성도나 다양성을 크게 기대하지 않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처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공연이 올라가고 관객들은 극장을 찾는다. 지역 연극의 강한 생명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연극인들의 열정과 관객들의 관심, 그것은 지역 연극을 현재까지 견인하고 유지해온 힘이 될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지역 고유의 역사와 정서가 담긴 창작극 레퍼토리의 발굴을 통해 차별화된 무대를 보여주려는 공연이 많은데, 차별화된 창작극 무대야말로 지역 연극이 강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극단 장자번덕의 <>(백하룡 작, 김종필 연출, 2023.11.16.~11.17, 문화예술회관대공연장)사천시 지역브랜드 시리즈로 기획된 창작극으로서 지역의 전설이나 설화, 혹은 인물 등을 소재적 차원에서 소비하는 연극과 차별화된 무대를 보여준다. 사천시 비토섬을 배경으로 하는 별주부전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연극적 상상력과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무대를 경험시켜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물론 이번 공연이 창작 초연이며, 공연 준비 기간도 상당히 짧았기 때문에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지만, 지역 연극의 경쟁력과 관련하여, 지역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창작극 레퍼토리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사진제공: 극단 장자번덕

 

 

희곡의 힘, 매혹적인 반전의 장치

  <>은 실패를 거듭하다 바다에 몸을 던진 중년 사내 김 씨와, 그의 목숨을 구해준 별주부가 토끼를 함께 찾아다니는 과정을 다룬다. 로드 무비 서사처럼, 이 연극도 장소의 이동에 따라 서사가 전개되는데, 비토섬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출발하여 지리산, 삼천포, 서울의 남부터미널, 차압 딱지가 붙은 김 씨의 집, 락카페, 안마방, 123층 펜트하우스 등을 거쳐 김 씨의 반지하방에 도달하면서 막이 내린다. 흥미로운 것은 극의 전개 과정에서 두 인물의 탐색 대상이 바뀐다는 데 있다. 초반에는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를 찾아 나서지만, 서울에 도착한 이후로는 김 씨 가족을 추적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것은 반전의 장치를 활용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토끼의 존재를 은폐하다가 대단원에서 그 정체를 폭로함으로써 관객에게 강한 정서적 충격을 주고, 더 나아가 작가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도록 하기 위한 서사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연극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결말의 반전에 있다. 대단원에 이르러 김 씨는 토끼굴을 닮은 반지하방에 도달하는데, 거기서 바닥에 남은 스프레이 자국을 보면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그는 1975년 생 토끼띠 김 차장이다. 평생을 평범하게 살았으나 회사에서 정리해고가 된 이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치킨집 사업이 망하고 주식과 코인 투자에도 실패하면서 경제적 파탄에 이르고, 살던 집이 차압을 당하자 반지하로 이사한다. 아내가 안마시술소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지만 김 씨는 희망 없는 삶에 좌절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다. 아내와 딸을 살해한 뒤, 자신도 바다에 몸을 던지지만, 별주부 덕분에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이다. 모든 사실을 기억하게 된 김 씨는 죄의식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오열하고, 이를 말없이 지켜보던 별주부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던지며 막이 내리게 된다.

 

그래 너다. / 별자리에 가장 가까운 곳에 선 말하는 토끼 / 바로 너다.

 

울어라 인간아/ 또 기억하라 / 망각하지 말고 / 변명하지 말고 / 왜곡하지도 말고/ 땅을 치고 / 오열하고 오열하라 (중략)

 

(백하룡 작, <> 공연대본, 2023.9.15 1, 52-53쪽)

 

  별주부는 자신과 김 씨가 찾아다녔던 말하는 토끼가 바로 토끼띠 김 씨였음을 재확인시켜주고, 김 씨와의 여정이 바로 그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찾아주기 위한 것이었음을 함축적으로 말해준다. 가족을 살해하고 망각과 죽음을 통해 죄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김 씨에게 죄를 묻고, 개인의 삶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비정한 자본주의 시스템에도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사천으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극적 공간들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비유하는 듯하다. 그리고 극의 초반부터 대단원에 이르기까지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고래의 울음소리를 통해 그러한 세계가 병들어가고 있음을 경고하는 것 같다.

  이처럼 <>별주부전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만큼 서사, 캐릭터, 주제나 문제의식 면에서 원작과 상당한 차이성을 드러낸다. 원작의 서사적 모티프를 소재적 차원에서 활용하지 않고, 연상과 비약의 원리에 따라 과감하게 해체하고 재구성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용왕의 을 고래의 신음 소리로 표현하고, 이를 통해 병들어가는 세계를 환유한다거나, 별주부가 찾아다니는 토끼의 간로 변주하여, 김 씨의 기억과 죄의식으로 상징화한 것은 발상의 기발함이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작품의 표제 은 핵심 캐릭터인 자라()를 의미하거나, 죽어서 별자리로 남은 김 씨의 아내와 딸의 존재(혹은 부재)를 환기시키고, 더 나아가 이들을 살해한 김 씨의 죄의식을 상징하기도 한다.

  주목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하거나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장면은 아쉬움이 남는다. 동물들이 다수 등장하여 우화극을 연출하는 지리산 장면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분량에 비해 극적 기능이 약하고 대사와 극적 상황이 평이하여 지루함이 느껴지는데, 과감한 생략과 압축이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토끼굴, 클럽 바니바니, 바니맨, 바니걸 등 토끼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이 너무 산만하게 나열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미지의 취사선택이 필요할 듯하다. 마지막으로 클럽 장면, 안마방, 펜트 하우스 장면들은 행동의 동기나 장면의 목표가 다소 모호하다. 극적 상황이 선명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텍스트를 수정, 보완하면 좋을 것 같다.

 

사진제공: 극단 장자번덕

 

  다양한 표현방식의 모색

  사실상 이러한 희곡 텍스트의 틈을 연극성으로 보완하여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연출의 역할일 것이다. 이 공연은 전체적으로 현대성, 연극성, 문학성이 전경화된 무대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대본의 판소리 형식을 상당 부분 생략하고, 대신 조명, 음악, 영상을 통해 현대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든가, 동물이 다수 등장하는 지리산 장면에서 가면을 활용하여 우화극처럼 장면을 연출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액팅 부분에서는 사실적인 스타일로 서정적인 대사를 살리되 시공간의 전환이나 비현실적인 장면에서는 양식적인 신체 동작 이미지를 활용한 것도 눈에 띈다. 극 초반 김 씨가 바다에 빠져 독백하는 장면은 김종필 연출이 지향하는 연출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무대 뒷면에 설치된 타임 워치의 숫자로 김 씨가 점차 의식을 잃어가는 상황을 연출하는 한편, 조명을 통해 비현실적인 공간을 몽환적으로 시각화한다. 이때 김 씨 역을 맡은 배우는 마치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 망각과 기억 사이의 공간 사이에서 느리게 유영하는 듯한 동작을 보여주면서 상당히 긴 내적 독백을 한다. 이 장면은 극의 마지막 장면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핵심적인 장면인데, 배우의 독백과 동작, 조명과 음악, 오브제 등이 조화를 이루면서 작품의 메시지를 시적이면서도 연극적으로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연상시키는 오브제를 등딱지처럼 메고 있는 별주부의 의상이 흥미로웠는데, 이처럼 과장되고 엉뚱한 만화적 상상력을 조금 더 강화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무대 연출 면에서 다양한 연극적 표현 방식을 모색한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나, 그 때문에 스타일 면에서 통일성이 약화된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또한 공간의 이동이 빈번한 작품이니만큼 무대 세트를 더욱 미니멀하게 하고, 대신 조명이나 배우의 역동적인 동선을 통해 공간을 창조했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역 연극의 가능성

  <>은 관록 있는 극작가 백하룡과 신진 연출가 김종필의 콜라보 무대라는 점에서 기대를 불러 모은 공연이었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이 작품은 첫째, ‘별주부전을 모티프로 하였음에도, 극적 서사, 캐릭터, 주제 의식 면에서 현대성이 상당히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특징적이다. 예측을 불허하는 엉뚱한 상상력, 서정적이면서도 시적인 대사, 맛깔스럽고도 능청스러운 표현은 백하룡 작가의 극작술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둘째, 준비 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대의 표현 형식에 대해 상당히 고민한 흔적을 보여준다. 사실적인 스타일과 양식적인 스타일을 절충한 연기를 보여준다거나 라이브 음악, 영상, 조명, 인형극 등 다양한 표현 방법을 통해 관객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무대를 연출한 것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덕분에 흥미롭고도 다양한 무대를 펼쳐보이지만, 절제와 생략의 미덕이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셋째, 과거와 현재,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면서 안정감 있고도 폭넓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의 연기력도 높게 평가할 만하다. 어쩌면 이러한 배우들이야말로 극단 장자번덕뿐 아니라 지역 연극의 진정한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번 공연에서 발견된 문제들은 지속적인 공연작업을 통해 수정, 보완될 것으로 기대된다. 여전히 번역극이 강한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는 연극계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이처럼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의 정체성이 살아있는 차별화된 창작극을 제작하여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창작극의 발전과 아울러 지역 연극의 인프라 구축에도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한다.

 

 

백로라

연극평론가. 숭실대학교 예술창작학부 문예창작 전공 교수. 새로운 발상이 돋보이는 실험적인 퍼포먼스에 관심이 있고, 생산적인 비평과 연구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