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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인간의 진보를 위해 희생된 모두를 위한 씻김굿 <친절한 고르스키씨>, 연극평론가 김기란

연극평협 2024. 2. 2. 13:15

인간의 진보를 위해 희생된 모두를 위한 씻김굿

 <친절한 고르스키씨>

 

김기란

 

  <친절한 고르스키씨>(2023.11.18.-11.19, 민송아트홀 2관)는 극단 사개탐사의 박혜선이 연출한 작품이다. 코로나19로 셧다운된 상황에서도 박혜선 연출은 만담 <남북의 일요일>(2019), 낭독공연 <벗>, 렉처퍼포먼스 <산 넘어 여기>(2021), 평화잡담 <전쟁과 사람>(2023) 등 다양한 형식의 무대를 선보였다. 이번 ‘월드 2인극 페스티벌’에서도 2인극 소재로서는 평범하다 할 수 없는 내용을 다루었는데, 그것은 과학기술이 야기한 트라우마를 주술의 힘으로 치유한다는 내용이다. 2인극이라는 제한된 형식을 통해 과학과 주술에 대한 심리적 거리를 넘어설 수 있는, 극적 설정을 60여 분 동안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이는 무대와 연기에 앞서, 대본이 지닌 극적 설득력이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친절한 고르스키씨>의 성과는 2인극에서 기대함직한 극적 밀도보다는, 영상을 활용하고 굿을 수용하여 2인극의 외연을 확장한 무대 표현의 시도에서 찾을 수 있었다.

  60년대 냉전 시대 과학의 진보를 내세운 우주 탐사의 패권 다툼은 국가 간‘총성 없는 전쟁’이었다. <친절한 고르스키씨>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우주 탐사의 이면과 남겨진 자들의 상처 없는 고통을 다룬다. 미지의 영토를 향한 국가 간 패권 다툼 앞에 인간을 대신한 영장류들이 우주로 보내졌던 시절이 있었다. 미국은 1948년에서 1951년까지‘앨버트(Albert) 1-6’으로 명명한 붉은털원숭이 6마리를 우주로 보냈다. 1961년 1월 머큐리 레드스톤 2호에 탑승해 우주로 떠났던 침팬지‘햄(Ham)’은 지구로 귀환하기도 했지만, 우주로 보내졌던 많은 영장류와 인간들은 지구로 돌아오지 못한 채 희생되었다. 우주 탐사에 나선 인간의 영광만을 기억하는 인류사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하지만 당시 희생된 우주인들은 물론이고 동물의 권리나 행복추구권을 생각하게 된 지금, 여기에서 영문도 모른 채 인간의 대신하는 실험의 대상이 되었던 원숭이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롭고 문제적인 소재가 될 수 있었다.

기하라 작, 박혜선 연출 <친절한 고르스키씨>&nbsp;ⓒ 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제공

 

  극 중 배경은 1969년 미국의 허름한 심리상담소, 인류 최초의 달 착륙 우주인이자 한국전쟁 참전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암스트롱(강현우 분)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정착한 미국에서의 삶에 지친 사이비 심리상담소장 미스터 킴(최승주 분)을 찾아오면서 극은 시작된다. 암스트롱은 한국전쟁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추락 직전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전력이 있다. 역사 속 실존 인물인 암스트롱의 삶의 일부가 지금, 여기 우리와 미세한 연관을 맺는다.

  어린 시절 암스트롱에게는 죽음의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준 이웃집 아저씨‘친절한 고르스키씨’가 있었다. 고르스키씨는 이후에도 암스트롱에게 환청으로 나타난다. “내일은 외출하지 마라, 점심은 치즈버거가 좋다, 여행은 다음 주로 미뤄라, 당분간 비행기는 피해라, 주식은 지금 팔아라” 등등 고르스키씨는 암스트롱의 수호신이 되어 그의 안위를 챙긴다. 달착륙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에 시달리는 순간, 암스트롱은 자신의 수호신이 된 고르스키씨를 떠올리고, 이승을 떠나 사바세계에 돌아갈 수 있도록 굿판을 열어달라는 고르스키의 환영에 시달리게 된다. 암스트롱이 미스터 킴을 찾아오게 된 배경이다. 사기꾼처럼 높은 상담료를 제시하며 배짱을 부리던 미스터 킴은 충청도의 유명 만신이자 무당으로 살아가는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 한바탕 굿판을 준비한다. 우주 탐사에 희생된 인간과 영장류(침팬지)들을 위로하는 씻김 굿판이 된다.

  우주탐사, 한국전쟁, 아메리칸 드림, 심리상담의 극적 연결고리는 매우 듬성하다. 연관이 느슨한 극적 상황을 메우는 것은 두 배우의 과장된 연기이다. 서투른 한국식 영어 발음으로 암스트롱이 한국전쟁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빙의된 사람처럼 미스터 킴의 가족사를 맞출 때, 관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여기에 조국을 등진 이민자 미스터 킴이 가족을 버리고 미국에 도착한 후 고군분투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신파적으로 쏟아내면 공연은 확실히 희극적 성격을 드러낸다.

  하지만 <친절한 고르스키씨>에서 이들 요소를 연결시키는 한 방은 본질적으로 인과 관계에 대한 질문 자체가 거세된 굿판이다. 묻고 따지기에 앞서 의심 없는 믿음으로 작동하는 주술의 세계를 <친절한 고르스키씨>에서는 마지막 장면으로 배치했다. 그것은 인류의 진보와 평화 수호라는 고귀한 목적을 위해 희생된 모든 영장류들을 위한 굿판이다. 관객을 긴장시키기보다 숙연케 만든 마지막 장면은 마네킹의 몸체를 갑옷처럼 장식하고, 솥두껑을 올려 투구를 만들고, 은박 호일로 된 칼을 장착한 장군신을 모셔 놓고 올리는 씻김굿이었다. 씻김굿에 동행한 것은 우주 탐사 프로젝트의 실험체였던 65호 침팬지 ‘햄’과 최초의 미국 우주인 에드워드 화이트의 영상이다. 미스터 킴 의 입에서 공수처럼 이별가가 쏟아지고, 종이 꽃가마를 태워 길닦음이 끝나면, 침팬지 햄의 사진과 기록 영상이 투사된다. 진보를 위한 인간의 꿈은 계속된다는 듯, 우주로 향하는 미국의 발사체가 투영된다. 그것이 진보에 대한 의문인지 진보에 대한 응원인지는 모호한 상태로 남겨진 채. 의미심장할 수 있었던 마지막 장면의 영상이 모호해진 맥락 속에는 진보 뒤에 숨겨진 희생을 치유하는 방법이 주술적 치유 이외에는 없는 것일까 라는 질문이 함께 한다.

기하라 작, 박혜선 연출 <친절한 고르스키씨>&nbsp;ⓒ 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제공

 

  <친절한 고르스키씨>에서 대의를 위해 희생된 개별적 삶과 생명에 접근하는 방식은 단순하고 제시된 치유의 방법은 낭만적이다. 기하라 작가의 대본이 진보라는 어휘에 담긴 절대적 가치를 의심하고 탐색하기보다, 그에 따른 결과를 치유하는데 극의 내용이 집중되었던 탓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인류의 진보에 따른 불가피한 희생을 애도하고 남은 자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법은 평화를 기원하는 굿판, 주술적 기원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진보를 내세운 인간의 욕망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친절한 고르스키씨>의 마지막 영상이 암시하는 것처럼 멈춤 없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암스트롱을 괴롭히는 죄의식, 불안, 공포를 잠재운 것은 이웃집 아저씨인 고르스키씨의 친절함이었지만, 모든 생명체의 진전된 삶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개인의 친절한 심성에만 기댈 수 없다. 포스트 휴머니즘의 희망과 인류세의 불안이 중첩된 지금, 우리에게 자명한 것은 더 이상 인류의 진보를 위한 불가피한 개별적 희생이 당연시 될 수는 없다는 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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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공식 참가작

연극 <꽃, 피우다>

공연 일시 : 2023.11.18. ~ 11.19.

공연 장소 : 민송아트홀 2관 

작|기하라

연출|박혜선

극단 사개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