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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2인극이 성취해야 할 공연의 밀도 <꽃, 피우다>, 연극평론가 정수진

연극평협 2024. 2. 2. 13:08

2인극이 성취해야 할 공연의 밀도

<꽃, 피우다>

 

정수진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는 원래 1명뿐이었다. 대화보다는 코러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던 공연 환경에서, 아이스킬로스는 처음으로 배우의 수數를 두 명으로 늘리고 코러스의 역할을 축소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대화가 드라마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 배우 두 명이 마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갈등이 무대 위에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2인극은 인간의 갈등을 집약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연극의 형식이다. 단 두 명의 배우만으로 내면적 갈등부터 자아와 세계와의 갈등까지 심층적으로 무대화하여, 궁극적으로 공연의 밀도를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배우라면 꼭 한 번 도전해 보고픈 연극의 형식이라 하겠다.

2023 ‘월드 2인극 페스티벌’은 “깊고 넓게 2인극”이라는 주제로, 2인극 본연의 목표를 분명히 되새긴다. 올해로 23회를 맞이한 이 축제의 의의는 단지 시간의 축적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간 축제를 통해 발굴되어온 2인극 작품들의 누적된 숫자와 질적인 측면이 ‘월드 2인극 페스티벌’을 23년간 지속해온 동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0월 29일에 개막된 축제는 앞으로 한 달 동안 대학로 여러 극장(민송아트홀 2관, 극장 동국, 예술공간 혜화, 후암스테이지 등)에서 계속될 예정이다. 11월 26일까지 총 96편의 2인극이 공연되는데, 공식참가작은 총 12편이다. 필자는 11월 12일 일요일 오후 <꽃, 피우다>와 <이상의 날개> 두 편을 연달아 관극하였다. 

 

 

 

늦가을 강가에서 만난 두 여자

 

<꽃, 피우다>(송현진 작, 이정하 연출, 민송아트홀 2관, 2023.11.11~11.12)는 2022년 아시아 연출가전에서 선보인 동명의 희곡을 다시 무대화한 작품이다. 2018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출신 극작가 송현진의 작품으로, 극단 각인각색의 대표이자 상임연출 이정하가 연출을 맡았다. 집을 나온 ‘여자’(한혜수 분)가 강가 시외버스정류장에서 낯선 ‘그녀’(박무영 분)를 만나,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 여성 2인극이다.

극장에 들어서니 이미 무대가 환히 밝혀 있었다. 무대 전면에는 해질녘 가을 강가의 고즈넉한 풍경이 영상으로 펼쳐져 있고, 그 한가운데 연극 제목 ‘꽃, 피우다’가 멋스러운 필체로 새겨 있다. 수채화를 닮은 무대 배경 영상은 명암이 바뀔 뿐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어두운 톤으로 점차 변화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주거나, 정류장의 풍경으로 바뀌면서 극적 장소를 부각시킨다. 공들인 배경 영상에 비하면 무대는 매우 단출하다. 하수 쪽에 나무 벤치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것이 <꽃, 피우다> 무대의 전부다. 

짧은 커트 머리의 한 여자가 등장하면서 연극은 시작된다. 집을 나온 ‘여자’다. 입고 있는 트렌치코트와 강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 등이 왠지 모를 쓸쓸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담배를 꺼내 물고 피우려다 그만두고 벤치에 앉는데, 뒤편에서 손 하나가 쑥 나오더니 담배를 잡아챈다. ‘그녀’의 등장이다. 한적한 시골 버스정류장의 적막을 깨는 깔깔대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한바탕 이어지고, ‘그녀’는 ‘여자’에게 불을 빌려서 ‘여자’의 담배를 맛있게 태운다. 그렇게 누가 보아도 사연 있어 보이는 두 여자는 늦가을 강가의 외딴 버스정류장이 허락한 익명성에 기대어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송현진 작, 이정하 연출 <꽃, 피우다>&nbsp;ⓒ 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제공

 

삶이 무거운 여자, 죽음도 가벼운 그녀

 

보통의 2인극에서처럼, ‘여자’와 ‘그녀’는 상반되는 이미지와 성격으로 설정되었다. ‘여자’는 착한 남편과 기쁨을 주는 자식도 있는 기혼여성이다. 안정적인 삶을 살아온 대신 책임져야 할 것이 많은 무거운 삶을 살고 있다. 반면 ‘그녀’는 삶과 죽음 모두 별다를 것 없다고 생각하는, 돌볼 것 하나 없는 가벼운 인생이다. 

우연으로 끝날 뻔했던 두 여자의 만남은 ‘여자’에 대한 ‘그녀’의 궁금증으로 인해 하나의 사건이 된다. 거리낄 것 없는 자유로운 ‘그녀’는 무거운 삶의 그림자를 한껏 늘어뜨린 ‘여자’를 궁금해 한다. ‘그녀’는 첫눈에 ‘여자’를 둘러싼 죽음의 기운을 간파한다. 사실 겉모습만으로는 외딴 강가에서 샴페인을 병째로 들이키며 빨간 원피스 자락을 휘날리는 ‘그녀’가 ‘여자’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위태롭다. 심지어 극 초반 ‘여자’는 ‘그녀’에게 “(강물에) 뛰어들지 말지”라는 대사를 건네기도 한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행동의 초점은 오직 ‘여자’의 사연으로만 모아지며, 정작 위태로운 인물은 ‘그녀’가 아닌 ‘여자’임이 밝혀진다. ‘여자’는 지나치게 통제적인 엄마의 기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치매에 걸린 엄마의 자살 현장을 목격하게 된 사건으로 인해 영원히 엄마라는 존재에 결박당한 인물이다. 강물에 뛰어들고 싶었던 것은 ‘그녀’가 아닌 ‘여자’였던 것이다. 

송현진 작, 이정하 연출 <꽃, 피우다>&nbsp;ⓒ 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제공

 

미처 도달하지 못한 2인극의 밀도

 

이처럼 연극 <꽃, 피우다>는 오로지 ‘여자’의 사연에만 집중한다. 이는 2인극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그녀’를 그저 보조적 인물로 축소해 버리는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했다. ‘그녀’는 첫 등장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여자’에게 질문만 던진다. 이러한 상황은 극이 진행될수록 더욱 심화된다. ‘여자’가 친정엄마 장례식을 회상하는 절정 장면에서, ‘그녀’는 “난 널 도와주러 온 거니까”라며 마치 저승사자 또는 ‘여자’의 내면적 목소리와 같은 알 수 없는 대사를 던진다. 결국 극적 갈등은 ‘여자’의 내면적 갈등이었던 것이다. ‘여자’는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다시 꽃 피우”겠다는 다짐을 품고 시원한 미소를 남기며 무대를 떠난다. 

그런 점에서 연극 <꽃, 피우다>는 두 인물이 등장하긴 하지만, 주인공 ‘여자’의 내면적 독백을 극화한 1인극에 가깝다. “50대 여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꽃처럼 피어나는 과정을” 그려내고자 했던 작가의 소망은, ‘그녀’가 아닌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한혜수(‘여자’)와 박무영(‘그녀’) 두 배우는 모든 장면을 견디며, 서로를 대면하여 반응하려 애썼지만, 객석을 설득할 만한 앙상블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두 역할의 불균형한 극적 설정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호흡의 밀도를 이루어내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던 것이다. 

2인극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것은 무대 위 두 인물이 창조하는 뜨거운 겨룸이다. 두 인물이 서로를 대면하여 각자의 목표를 향하여 돌진하며 부딪히는 그 현장의 밀도 있는 공기. 그것이 창조하는 갈등의 폭발 속에서 작품의 핵은 관객의 전 존재를 휘감는다. 이것이 2인극이 도달해야 하는 성취의 지점인 것이다. <꽃, 피우다>의 다음 공연에서는 2인극에 합당한 밀도를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정수진

연극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객원교수. 우리 근대극 형성기에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들을 공부하는 중이다. 공저 학술서 『연극의 고전 다시 읽다』(한국연극학회 편, 연극과인간, 2023)와 희곡 에세이 『한 줄도 좋다, 우리 희곡』(테오리아, 2021)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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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공식 참가작

연극 <꽃, 피우다>

공연 일시 : 2023.11.11. ~ 11.12.

공연 장소 : 민송아트홀 2관 

작|송현진

연출|이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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