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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앙상블의 합과 차, <샤프심> <공무도하>, 연극평론가 김남석

연극평협 2024. 2. 2. 13:02

앙상블의 합과 차

 

김남석(연극평론가)

 

1. 극단 두하늘의 <샤프심> : 되바라진 학생과 엄숙한 선생님의 견해차

 

극단 두 하늘의 <샤프심>은 방문한 학생과 그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견해 차이를 그려내고자 한 작품이다. 나이 든 세대가 판단하는 관점을 반영이라도 하듯, <샤프심>에서 수업을 찾아온 학생은 맹랑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이에 반해, 선생님은 이러한 학생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현 시국을 반영하려는 듯, 감당하기 어려운 학생에게 쩔쩔매며 끌려다니고 있었다. 일견하면, 이러한 교사와 학생의 모습은 이 시대의 통념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실감을 획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샤프심>의 희곡 대본은 시대적 통념에 구체성을 더했다고는 보기 어려웠다. 2인극이 감당해야 하는 닫힌 세계에 대한 구속력이 지나치게 완강하게 작동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실 세계와 극 중 현실에 대한 유비추리가 역효과를 일으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궁극적으로 현실의 교사-학생 관계를 샤프심-연필심의 관계로 치환하여 무대 위로 끌어들이고자 했지만, 샤프심과 연필심에 관한 비유나 그 대비는 효과적인 무대 언어로 살아나지 못했다. 

이진수 작, 나예온 연출 <샤프심>&nbsp;ⓒ 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제공

 

학생인 소녀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꿈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꿈에서 자신이 샤프심이 된 상황을 설명하고, 비록 꿈이지만 자신의 인생이 나아갈 바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샤프심(과 같은 처지)이 되고 싶지 않고, 또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공부에 시달리고 미래를 불안해하는 학생에게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발언이고 태도라는 측면에서는 그 학생의 꿈이 현실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이러한 소녀의 꿈과 미래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현실의 문제를 담아내기에 샤프심의 비유는 낯설고 또 불안전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극중에서 소녀는 거꾸로 연필심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그 이유로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바꾸어 말하면 샤프심은 언제든지 대체 가능하여 소모품으로 사라질 수 있는 물건이고, 연필(심)은 그렇지 않다는 논리를 앞세운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유와 대비는 그다지 확고한 설득력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현실적으로 연필심이 대체 불가능하고 고유하다는 비유를 이해하기 어려우며, 그로 인해 샤프심이 그 반대 위치를 점유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찬성하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설득력이 약한 이러한 비유와 대조를 연극 시작부터 끝까지 끌고 가면서 자못 풍성할 수 있는 대사의 활동을 방해했고, 배우들의 연기를 불필요한 개념 속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샤프심 수술과 같은 장면은 대표적인 혼란이 아닐 수 없다. 무대 위에서 카메라를 활용하여 다른 각도의 영상을 만들어낸다는 형식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샤프심 수술이 가져오는 연극적 파장은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비유와 대비에 의한 극적 설정이나 유비추리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극적 사건 자체가 탄탄해야 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샤프심-연필심의 설정을 뒷받침하며 서로를 비출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샤프심-연필심에 관한 고착된 대사는 이러한 틈과 조응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사가 지나치게 주변적인 것에 고착되었다면, 연기는 이러한 대사에 종속되면서 불필요하게 빗나갔다. 학생은 고음으로, 선생님은 저음으로 시작된 이 연극의 톤은 선생님의 톤이 올라가고 학생의 톤이 내려가지 않으면서 갈등 국면을 맞이하는 듯했지만, 이내 그 톤으로는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플롯이 진전되면서 갈등을 심화시켜야 할 대사가 내용상 같은 자리를 맴돌자, 같은 상황을 표현해야 하는 두 사람의 연기 역시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관객의 입장에서 간절하게 바라게 되는 것이 서사의 전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샤프심>은 이를 충분히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진수 작, 나예온 연출 <샤프심>&nbsp;ⓒ 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제공

 

<샤프심>이 갈등을 심화시키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학생과 선생님의 갈등이 상식적인 관찰 속에서 이미 알고 있는 일상적 갈등(반목)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흔히 학생은 공부를 멀리하고 싶어 하고, 그 이유로 자신의 고유함을 주장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자신의 인생을 앞세워 목전의 위기(수업)를 모면하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이것은 크고 작은 정도 차를 수반하지만, 일반적인 수업과 보편적인 학교에서라면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극 중에서 학생인 소녀 역시 그러했으며, 그러한 소녀의 행동이 끝까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이어진다는 점도 동일했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우리가 보는 모습 그대로였던 셈이다. 

선생님의 대처 역시 대동소이하다. 작품의 결말에서 다소 의미심장한 변화를 남긴 것 이외에는, <샤프심>에서 선생님의 대처 방식 역시 현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학생을 달래거나 구슬리고, 시간이 지나면 야단치고, 때로는 은근히 협박하고, 어떨 때는 읍소하며, 심지어는 다른 말과 선택으로 학생을 현혹하기도 한다. 게다가 가용 가능한 모든 방식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선생님 스스로 만족감을 뿜어내기도 한다. 이 역시 현실의 선생님들이 사용하는 방식이며, 우리가 학교를 통해 이미 보고 기억하는 방식이다. 

만일 두 사람이 현실의 사제 간 모습과 그 문제를 그대로 보여 주는 연기에 치중했다면, 이 <샤프심>의 목표나 공연은 그에 맞추어져야 했다. 하지만 서사는 학생과 선생님의 일상적 세계 너머의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처럼 자세를 취했고, 실제 무대는 이러한 이면의 서사를 제대로 구현하거나 보완하지 못하면서, 관객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모르는 채 객석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다인극보다 일인극이 어려울 수 있고, 그러한 일인극보다 2인극이 어려울 수 있다면, 이때의 2인극은 무대에 달리 숨을 데 없는 배우들이 상대와의 정밀한 호흡 밖으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야기되는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샤프심>의 학생은 선생님이 보여 주는 리액션으로 인해, 전혀 궁지에 몰리지 않았는데도 궁지에 몰리는 학생으로 변모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선생님 역시 되바라진 학생으로 인해 자신의 내면과 사물의 이면에 숨겨진 감정과 행동을 끄집어냈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만족스러운 표출을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두 사람의 연기 앙상블이 일정한 궤도 위에서 벗어나, 어긋남의 차이가 극명해졌기 때문이다. 

 

 

2. 창작집단 유희자의 <공무도하> : 비극적인 아내와 헌신적인 남편의 연기 합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와 시한부 인생을 통보받은 남편이 있다. 남편은 죽음을 앞둔 선고에도 다른 고민이 있어 보였는데, 그 고민은 치매를 앓고 있는 부인에 대한 미안함과 책임감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연극은 그 미안함에 더욱 깊게 다가가고자 했고 그 책임감의 끝을 보여 주고자 했다. 과거 두 부부가 살았던 날과 그날들 속에서 겪었던 아픔이 덧붙여졌다. 남편은 젊어서 집을 자주 비웠고, 그 이유는 대부분 회사와 그 회사에서의 파업 때문이었다. 위험한 일에 매달리는 남편을 아내는 불안하게 지켜보았지만, 남편은 그러한 아내의 걱정을 간과했고 자신이 가야 한다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회사 측은 파업에 적극적이었던 남편은 가만두지 않았고,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보금자리를 잃을 위기로 빠져들었다. 

더 큰 위기도 찾아 왔다. 아들의 죽음이었다. 아들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사망했는데, <공무도하>는 죽음의 이유보다는 죽음의 결과에 천착했다. 엄마였던 아내는 아이를 잃고 세상의 중심을 잃은 처지가 되었다. 치매 증상이 심각해지면서, 사라져 버린 아들을 현실에서 찾는 시간과 강도가 늘어났다. 시간의 전후도 뒤얽혔고, 아픔의 강도도 거세졌다. 

정재춘 작, 이신영 연출 <공무도하>&nbsp;ⓒ 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제공

 

아내가 찾는 것은 아들뿐만 아니었다. 가난했던 어릴 적 잃은 동생도 그녀에게는 아들과 다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공무도하>에서는 그러한 아내를 처연하게 바라보며 미처 대응하지 못하는 남편의 연기가 작품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남편 역을 맡은 박우열은 그 연기를 미처 끝내지 못하는 대사, 낮게 뇌까리는 독백, 그리고 우울한 느낌을 섞어 수행하고자 했다. 아내의 혼란에 참다못해 아들의 부재를 알릴 때까지, 그도 남편 연기에 긴장감보다는 참을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아내 역시 가끔 맨정신으로 돌아올 때면,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고자 했다. 아들을 찾고 동생을 찾고 과거를 찾고 자신을 찾고자 했던 그녀는 아들이 부재하고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그 상대편인 남편에게 일말의 희망을 주었지만, 결국 밀려오는 또 다른 상실감과 끝까지 정당하게 싸울 수는 없었다. 

그러한 상실감에는 잃어버린 동생으로 인한 상흔도 상당히 깊어 보인다. 그녀의 치매 증상이 깊어지면, 어김없이 나오는 동생에 대한 기억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녀에게 막내동생-아들-남편은 모두 자신이 잃어버린 존재들이다(남편은 기억 속에서만 간헐적으로 출몰하는 형태로만). 적어도 작가는 그녀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간 남자들의 영상과 흔적을 그러한 방식으로 애도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작의와는 별개로, 실제 무대에서 두 부부의 연기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서사가 과거의 층위로 뚫고 들어가지 전에 대부분의 사실(과거사)은 노출되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칫하면 한 여인의 깊은 한보다는 상투적인 넋두리로 전락할 가능성도 완벽하게 배제할 수 없었다. 치매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함께 나오는 남편의 나직한 울음과 참는 모습은 이러한 예측을 가중시켰다. 

무엇보다 아내의 증상-남편의 인고 사이에서 대사가 지체되었고, 상황은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극작가와 연출가는 관객들이 그녀의 내면 깊숙이 한 단계씩 들어가기를 바랐고, 남편으로 인해 그녀의 슬픔이 한 꺼풀씩 벗겨지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이지만, 무대 위에서의 정체는 이러한 바람과 예상을 무산시켰다.

정재춘 작, 이신영 연출 <공무도하>&nbsp;ⓒ 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제공

 

죽음을 앞둔 남편의 모습에서도 예측 가능하고 상투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다. 남편은 자신의 죽음, 즉 선고된 병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다. 대인배다운 풍모이고, 희생자다운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그녀의 삶을 이해한 사람의 그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결국, 현재를 무시하는 남편의 태도와, 과거에 집착하는 아내의 기억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진실은 그렇게 커 보이지만은 않았다. 외형적으로 두 사람의 삶은 슬프고, 안타깝고, 또 비극적으로 보이지만, 실상 기존의 슬픔과 안타까움과 비극적 면모에서 크게 변모된 모습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들의 사연이 슬프고 안타깝고 비극적인 것과, 그들의 앙상블이 그러한 속살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느냐는 판단 사이에는 여전히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3. 앙상블의 합과 차, 극장의 온도 차

 

두 작품에서 나타나는 아쉬움은 앙상블이 가져오는 상투성에서 연유한다. 되바라진 학생과 분노한 선생님이 보여 줄 수 있는 연기가 그대로 도입되었고, 상처를 가진 여인과 그 여인을 돌보아야 하는 헌신적인 남편 사이의 연기 역시 그대로 도입되었다. 현실에서 보이는 모습과 무대에서 연기하는 모습 사이에서, 무언가 달라질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강하게 남겼다. 우리가 아는 잘못된 사제 관계나, 우리가 들어왔던 순애보 같은 사랑에서, 새로운 연극이라면 보다 분명하게 짚어야 할 것들이 빠진 것은 아니었을까. 

샤프심과 연필심의 대비는 무리했고, 그렇기 때문에 일률적인 장면 제시는 효과적이지 않았다. 더구나 샤프심을 수술한다는 설정이, 그 이후 다시 유사 장면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되었다. 마찬가지로 되바라진 학생을 추궁하는 일상적인 선생님의 모습으로 리액션이 고착되어서도 안 되었다. 

한편, 순애보의 사랑은 무대에 눈물을 가져온다. 실제로 객석에서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연극은 이전에도 많았고, 현실에도 적지 않다. 문제는 그러한 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여 현실과 연극의 이면을 보여 주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함께 우는 연극보다는 울지 않고 우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냉정함도 필요했다고나 할까.

2인극이 특히 어려워 보이는 이유는 앙상블의 합과 차가 그 어떤 연극보다 작품의 운명과 성패를 극명하게 결정하기 때문이다. 희곡으로서의 작품이 지닌 불완전성을 이러한 앙상블은 더 요령 있게 조율할 수 있는 반면, 자칫하면 희곡이 지닌 태생적 완전성으로 인해 더 심하게 일그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앙상블이 가진 힘은 연극 자체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순순한 측면에서의 힘이었을 지도 모른다. 시간을 건너오면서 연극이 이러한 순수한 힘 이외에도 적지 않은 부가 요소를 확보했고, 그러한 부가 요소가 연극의 또 다른 외형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앙상블이라는 기본적인 힘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2인극 공연은 그래서 어쩌면 더욱 낯설고, 한편으로는 좀더 어렵고, 다른 한편으로는 숨을 곳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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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공식 참가작

연극 <샤프심>

공연 일시 : 2023.11.04. ~ 11.05.

공연 장소 : 민송아트홀 2관 

작|이진수

연출|나예온

극단 두 하늘

 

연극 <공무도하>

공연 일시 : 2023.11.04. ~ 11.05.

공연 장소 : 민송아트홀 2관 

작|정재춘

연출|이신영

극단 유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