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과 재미의 충돌, <1초>
최영주(연극평론가)
‘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첫 주자 중 하나는 ‘창작집단 꼴’의 <1초>로 이민구가 쓰고 손현규가 연출하였다. <1초>는 7명의 등장인물을 유소령과 김단아 2명의 배우가 연기한다는 의미의 2인극 공연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대체로 2인극이란 두 명의 등장인물을 두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것으로 정의되지만, <1초>의 경우 다수의 역할일지라도 두 명의 배우가 출연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때문에 두 명의 배우가 다중 역할을 연기하는데다가 앞 공연 <Constellations>에 이어 같은 공간에서 다양한 장면을 오가면서인지 공연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이민구의 극작술은 기승전결의 인과에 따른 전개가 아니라, 인물의 관계를 교차하여 플롯을 전개하고 과거의 기억을 개입시키면서 시제와 함께 대사와 서사가 섞이는 복합적인 양식을 혼재시키고 있다. 정보를 모아보자면 이렇다.
이 공연은 주미령과 주보라의 모녀 관계를 중심으로 예지라는 보라의 친구를 비롯하여 훈련 코치 등의 인물이 이들 모녀 관계에 합류하며 전개된다. 육상 국가 대표 선수이던 보라의 엄마 미령은 뜻하지 않게 보라를 임신하며 육상계에서 사라진다. 공연은 미령의 딸 보라가 성장하여 단거리 육상 선수가 된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시점은 엄마 미령이 회사를 다니다가 명퇴를 당하게 된 시점과 일치한다. 플롯은 소방차의 싸이렌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인권위원회에서 나온 직원이 미령의 문제를 보라에게 조사하면서 시작된다. 이어진 장면에서 보라는 1초를 줄이려 훈련에 집중하는 한편, 미령은 명퇴를 거부하다가 회사에 의해 화장실 옆으로 자리가 밀려나며 왕따를 당하게 된다. 엄마를 찾아 회사에 들른 보라는 엄마의 상황을 유트브에 올려 이슈화한다. 이런 상황에서 보라가 친구 예지를 때리는 학교폭력이 발생하고 이를 미안해하는 미령은 예지와 급속도로 친해진다. 결국 회사로부터 파면을 당하여 삶의 막다른 골목에 몰린 미령과 부잣집 딸인 척 행동하다가 들통이 나 왕따가 된 예지가 함께 불을 지르고 다니다가 예지가 죽고 미령마저 죽으면서 극은 파국을 맞는다. 공연의 서두에서 들리던 싸이렌 소리는 이들이 연쇄적으로 지른 불로 인한 화재와 관련된다.
<1초>에서 작가는 부모와 작식의 관계를 탐색하고 싶었다고 전한다. 이를 위해 그는 달리기로 전승되는 운명적 관계로 보라와 미령의 모녀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보라가 집착하는 ‘엄마의 등’은 그녀의 시선 속에서 모녀의 숙명적인 인연과 어긋남을 보여주는 동시에 관심을 암시한다. 엄마의 등은 따스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며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놀랍도록 강한 느낌을 촉발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예지는 다소 인위적인 설정에서 이들 관계에 개입하지만, 주제를 확장시키고 사건을 발생시키는 인물이다. 예지는 미령이 겪는 명퇴의 문제를 이 사회의 주변인들이 겪는 소외의 문제로 확장시키며 파국을 촉발함으로써 플롯을 완결한다. 그러나 코치가 미령과 같이 선수 생황을 한 동료였다거나, 보라가 엄마 미령의 성을 취하여 주씨이거나 또는 예지가 부모 없이 할머니와 단둘이 가난하게 살며 부자인척 하다가 등통이 나 왕따를 당했다는 등의 세세한 언급은 불필요하게 관객의 의식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 공연에서 연출가 손현규는 인위적인 사건 전개와 파편적 구성의 희곡을 2인극이라는 공연 양식을 통해 연극적으로 탐색한다. 무대 뒤편에는 역할 유희를 위한 옷이 걸려 있는 옷걸이가 놓여있고, 오른 쪽 앞에는 텔레비전 수상기가 놓여 있을 뿐 빈 무대이다. 김단아와 유소정 배우는 엄마와 딸의 역할을 중심으로 다양한 역할을 오가면서 역할 유희의 연극성을 전경화한다. 2인극이라는 제한적 상황이 희곡에 또 하나의 양식을 탐색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연이 시작되며 세 개의 장면이 이어서 전개되는 데, 각 장면은 보라와 직원, 보라와 감독, 보라와 미령의 세 관계로 구성된다. 이 과정에서 미령 역의 배우 김단아는 썬글라스와 모자, 점퍼 등과 함께 목소리와 몸짓으로 직원, 감독, 미령의 세 역할을 오간다. 이처럼 두 여배우가 일순간에 이뤄내는 역할의 변신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노골적으로 수행되기에 관객은 내용의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연극의 유희성에 웃음을 짓게 된다.
연극적인 유희성은 공연의 양식일 뿐 아니라 공연과 관객의 소통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즉, 다중 역할과 다중 공간의 유희적 양식은 <1초>가 제기한 보라의 엄마에 대한 경쟁심과 승부욕, 사회적 약자의 소외, 강요된 퇴직 문제, 학폭 등이 함축하는 문제의 심각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연극이라는 것을 노출시키면서 유희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엔딩 장면에서 마지막 방화가 발생하고 미령의 죽음이 암시되지만,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표현 양식에서 비롯되었을 법하다. 그럼에도 유소정과 김단아는 다중의 역할을 오가면서 열정적이고 진지하게 각 역할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였다. 특히 보라와 미령의 모녀 관계에서 두 배우는 엄마와 딸의 애증의 관계를 섬세하고 격정적으로 표현하였다. 두 배우는 역할에 거리를 두고 인물을 연기하기 보다는 인물의 상황에 공감하여 극적 긴장을 구축하고 감성을 표현하곤 하였다.
요컨대, <1초>에서는 공연이 관객과 소통하는 데에 있어 세 가지 겹의 의미 층이 개입하고 있다고 하겠다. 첫째, 작가는 문제적 상황을 구축하며 모녀 관계 외에 미령과 예지의 문제를 개입시켰고 그것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현실 문제를 환기한다. 둘째, 2인극의 조건에 의해 공연의 표현 양식은 극적 긴장과 현실적 문제를 연극성으로 상쇄시킨다. 셋째, 두 배우는 인물을 연기함에 있어서 극적 상황에 대한 인물들의 감성을 살려내어 극적 상황을 재구축하고 있다. 요컨대, 관극 과정의 혼돈은 이 세 겹이 통합되지 않은 채 관객과 각각의 요소에서 소통하기 때문이랄 수 있다. 비극적 내용과 연극의 재미가 충돌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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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공식 참가작
연극 <1초>
공연 일시 : 2023.10.31. ~ 11.02.
공연 장소 : 민송아트홀 2관
작|이민구
연출|손현규
창작집단 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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