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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만드는 이의 철학이다(영화 ‘빅나이트’-1997년, 캠벨 스콧 ·스탠리 투치 감독)

연극평협 2023. 7. 9. 19:36

 

-황승경-

<음식과 사람 7월호>

 

천혜의 자연조건으로 제철 식재료가 풍부하다보니 이탈리아는 식도락 문화가 발달했다. 고대그리스에서 넘어 온 와인과 15세기 오스만투르크가 비엔나를 침입하며 유럽에 퍼진 커피를 식사에 곁들인 것도 이탈리아 음식이었다. 이탈리아는 포크 사용 같은 ‘음식 법칙’ 또한 발달했다.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으로 이민 온 이탈리아인들은 이미 정착한 영국인, 프랑스인, 아일랜드인과는 차별화된 외식업에 진출하며 현지인에 맞는 이탈리아 음식을 개발했다. 그러다 보니 미국식 피자와 스파게티는 이탈리아 현지인들이 먹는 요리와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 영화 ‘빅나이트’는 미국화 된 이탈리아 요리에 적응하지 못 하는 정통 이탈리아 요리사 형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탈리아인의 음식문화

 

이탈리아 사람들은 먹는 문화를 상당히 소중히 여긴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3C(Calcio 축구, Chiachiere 수다, Cucina 음식)에도 당연히 음식이 들어간다. ‘대부’시리즈 같은, 이탈리아인에 대한 영화를 보면 그들은 아무리 바빠도 온 가족이 모두 모여 웃고 즐기며 식사를 하는데, 이는 이탈리아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식사를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영화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때는 1950년대, 이탈리아 남부의 두 형제 프리모(토니 샬호브)와 세콘도(스탠리 투치)는 이탈리아 음식을 미국에 선보이겠다는 야심찬 희망으로 아메리카 땅을 밟았다. 요리사인 형과 매니저인 동생은 일심단결해 ‘천국’이라는 의미의 ‘파라다이스’라는 레스토랑을 열었지만 파리만 날린다. 이탈리아 전통 음식을 고수하려는 형과 미국인이 원하는 음식을 내놓자는 동생은 사사건건 부딪친다. 레스토랑 운영은 난관에 봉착한다.

미국식 이탈리아 음식에 익숙해진 미국인들에게 파라다이스의 정통 메뉴는 생소했다. 가뜩이나 손님도 없어 그나마 온 손님들의 입소문이 아쉬운 마당에 형 프리모는 본인의 레시피만 고집한다. 코스 요리를 주문한 손님이 애피타이저를 먹고 1단계인 해물 리조토를 주문했다. 프리모는 조개, 홍합, 새우 등 해산물을 물에 넣고 육수를 우려내고 육수에 쌀을 넣어 적당하게 익을 정도로 천천히 끓인다. 농도를 맞추기 위해 프리모는 계속 저어 쫄깃한 쌀의 식감이 충분히 우러나오도록 심혈을 기울인다.

 

오늘의 요리는 해산물 육수에 익힌 리조토인데 손님은 통새우나 통가재 같은 해산물이 사이드에 보이지 않고 쌀만 보이자 해물요리가 아니라고 불평한다. 급기야 손님은 스파게티를 다시 주문한다. 요리사 프리모의 사전엔 1단계 음식을 두 번 주문하는 것은 없기에 격노한다. 이탈리아 요리는 4단계 이상을 코스로 거쳐야하는데, 이는 맛, 향, 식감, 풍미, 영양, 소화, 재료의 궁합 등 모든 것을 고려한 셰프의 자부심이다.

 

기원전 4세기에 <계절에 맞는 최상의 재료>라는 요리책이 저술될 정도로 이탈리아인들은 신선한 산해진미를 어떤 조리법으로 식탁에 올릴까를 고민했다. 동생 세콘도는 흥분한 형 프리모를 겨우 달래지만 형은 끝내 스파게티를 삶아야 할 냄비를 던져버리고 만다. 결국 대출금을 갚지 못한 형제의 레스토랑은 파산 위기에 다다른다.

 

손님이 원하는 음식 vs 요리사가 의도하는 음식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우리 속담처럼 이탈리아 음식은 음식 자체의 색 조합과 장식뿐 아니라 음식점의 분위기와 서빙하는 사람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까지 음식의 맛을 좌우한다고 여긴다. 홀 매니저인 동생 세콘도는 행커치프까지 착용한 말끔한 정장으로 손님에게 최대한 예를 다하지만 개인적 성향이 강한 미국 동부에서 이런 정성은 과유불급일 뿐.

 

길 건너편의 같은 이탈리아 레스토랑 ‘파스칼’엔 인산인해로 매일 저녁 손님이 넘쳤다. 사장인 파스칼(이안 홈)의 이름을 딴 파스칼은 미국인의 입맛뿐 아니라 취향에 맞게 식당을 운영했다. 재즈 음악이 흐르게 하고, 어두운 조명을 깔고 옆 테이블과 최대한 분리시켰다. 반면 형제의 파라다이스는 흡사 이탈리아의 레스토랑을 그대로 옮겨왔다고 할 정도로 내부 인테리어도 정통 이탈리아식으로 밝게 공사했다.

 

이탈리아에선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미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꿈을 이룬 사장 파스칼은 “손님의 니즈가 가장 우선”이라며 동생 세콘도를 설득한다. 동생은 요리사인 형에게 수차례 말했지만 소 귀에 경 읽기니 어쩔 수 없다. 이후 파스칼 사장은 세콘도에게 성공 비법을 털어놓는다. 최고의 재즈 뮤지션 루이 프리마가 동네에 왔을 때 호텔로 최고급 와인과 손 편지를 보내 경의를 표했는데, 그가 6개월 후 감사의 표시로 파스칼을 직접 방문했다는 것. 이후 슈퍼스타와 찍은 사진을 레스토랑에 걸어놓으니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 지역의 명소가 될 수 있었다는 스토리다. 파스칼 사장은 자신이 주선해볼 테니 다음 주에 그 뮤지션을 파라다이스에 초대하라고 조언한다.

세콘도는 주머니를 톡톡 털어 재즈 뮤지션을 위해 최고급 식재료를 준비한다. 벼랑 끝에서 잡은 마지막 기회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형제는 결의에 찼다. 그날 저녁, 형제는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동네사람들과 지역 언론 기자들까지 초대했다. 먼저 온 손님들에게 전채(前菜) 요리로 작은 크기의 빵을 구워 토마토, 아스파라가스, 치즈와 올리브유로 토핑을 올린 ‘크로스티니’를 대접한다. 아직 루이 프리마는 도착하지 않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 우선 먹기 시작한다. 포도주와 여러 전채 요리로 허기를 달랜 손님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음악에 맞춰 춤추기 시작한다. 음식점은 음식만 제공하지 않는다. 음식으로 왁자지껄 뭉친 감정을 풀며 인생의 참맛을 느끼게 해주는 열린 공간이다. 비로소 손님들은 이탈리아 요리의 여유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화려함보다는 디테일로 승부

 

흥겨운 시간은 흐르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루이 프리마는 그림자도 안 비친다. 어쩔 수 없이 메인 식사가 시작된다. 다른 전채 요리인 수프가대접되고, 첫 코스로 리소토가 대접된다. 각기 다른 소스로 만든 세 가지 색의 오묘한 리소토를 직접 서빙하면서도 세콘도는 재즈 뮤지션만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 

형제는 특별 요리 팀파노도 내놓는다. 팀파니(북) 모양의 그릇에 먼저 반죽을 넓게 깔고 안에 삶은 계란, 햄, 미트볼 등 온갖 신선한 재료를 넣어 오븐에 구운 파스타 요리다. 바깥쪽은 바삭하지만 안쪽은 원재료의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이 그대로다. 이탈리아 요리는 까다롭거나 화려하지 않고 가정식처럼 오밀조밀 섬세하게 디테일로 승부한다. 뒤이어 형제의 유려하고 수려한 요리가 계속 등장한다. 손님들은 감탄한 나머지 루이 프리마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는다. 마지막 후식 접시까지 모두 비웠지만 파라다이스 레스토랑의 구원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파스칼 사장의 거짓말이었다. 형제를 폭삭 망하게 만들어 두 사람을 자신의 레스토랑으로 스카우트할 속셈이었던 것. 오매불망 오늘만을 기다렸지만 모든 계획이 틀어진 형제는 허무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된 마당에 형은 이탈리아 로마로 돌아가 삼촌 레스토랑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우기고, 동생은 여기 남아서 끝장을 보겠다며 대판 싸운다.

다음 날 아침, 어제 옷 그대로 부스스 일어난 동생은 식당 부엌으로 가 말없이 계란을 깨 아무것도 안 들어간 이탈리아식 오믈렛을 만든다. 뒤이어 형이 부엌으로 들어온다. 형제는 함께 오믈렛에 이탈리아 빵을 한 조각 집어 들고 덥석 뜯어 먹으며 영화는 끝난다. 형제는 오믈렛으로 화해한다.

 

결말만 보면 형제들이 이탈리아로 돌아갈지, 어젯밤 손님들 입소문으로 대박이 날지 예상할 수 없다. 다만 이탈리아식 오믈렛으로 화해하는 장면을 보면 자신들의 음식 철학을 굽히진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