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서사로 거듭난 <흥부전> :
‘2023 남산소리극축체’, ‘창작하는 타루’의 <말하는 원숭이>
김효(연극평론가, 성결대교수)
서울남산국악당에서는 올해부터 소리극 축제가 열린다. 그 첫걸음을 내딛는 <2023 남산소리극축제>가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어린이 창작 소리극, 세 편을 엄선하여 프로그래밍하였다. 판소리가 ‘이야기를 노래로 풀어가는 연극’이라면, 판소리에 연극적인 요소를 강화하여 동시대의 문화적 취향과 감수성에 맞게 변형한 공연예술을 소리극이라 부른다. 판소리를 현대적으로 변형한 것이라는 점에서 창극도 소리극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창극이 뮤지컬처럼 무대 세트나 소도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심리를 표현하는 공연들을 특정하여 부르는 명칭인 데 반해 소리극은 사설과 소리에 집중하여 서사의 문학적인 감동을 전달하는 판소리의 표현 방식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공연예술을 총칭한다. 말하자면 판소리의 선율과 창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되, ‘재현’의 방법으로 장면을 연출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 창극이라면 소리극은 전통 판소리처럼 주로 소리꾼의 사설과 소리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양한 공연들을 아우르기 때문에 그 스펙트럼이 넓다. 재현적인 무대 세트에 의지하지 않는 소리극은 무엇보다도 저예산으로도 제작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고 풍부하고 자유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확장시킬 수 있다. ‘창작하는 타루’의 <말하는 원숭이>는 그와 같은 소리극의 이점을 십분 활용하여 형식의 간결함 속에서 밀도 높은 관객의 몰입도를 이끌어냈다.
<말하는 원숭이>는 제비 대신 원숭이를 등장시켜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재창작했다. 가족의 울타리 속에서 보호받으며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형제는 가장 첨예하게 부딪치게 되는 사회적 관계이다. 따라서 흥부와 놀부의 서사는 어린이들의 사회적 감수성을 강하게 자극한다. 헌데,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고쳐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이야기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측면이 있다. 이 공연에서는 그 부분을 거둬냈다. 그 대신 말하는 원숭이로 대체했다. 아동에게는 제비보다 원숭이가 훨씬 더 매혹적인 동물이다. 아동들은 사람을 흉내 내는 원숭이에 열광한다. 헌데, 사람의 말까지 따라 하는 원숭이라니! 기발한 발상이다.
늙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착한 동생은 추운 겨울날 어머니에게 따뜻한 방을 마련해드리기 위해 나무를 하러 산에 간다. 거기서 말하는 원숭이를 만난다. 동생은 자신의 말을 흉내 내는 원숭이와 의형제를 맺고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사람 말을 흉내 내는 원숭이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어 동생은 부자가 된다. 그 소식을 들은 욕심 많은 형이 와서 원숭이를 빌려 간다. 하지만 원숭이는 형의 말을 따라 하지 않는다. 화가 난 형은 원숭이에게 밥을 주지 않아 원숭이는 빈사 상태에 이른다. 사흘만 빌린다 했는데 소식이 없어 형을 찾아간 동생은 원숭이의 죽음을 목도한다. 원숭이를 묻어 준 무덤에서 분수처럼 쌀을 뿜어내는 쌀나무가 자라나고 착한 동생은 그 쌀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그렇게 착한 동생은 원숭이의 희생으로 ‘부(富)의 나눔’을 실천하여 온 마을 사람들을 가난에서 구제하게 된다.
이처럼 <말하는 원숭이>는 ‘다리를 다친 제비’ 대신 ‘말하는 원숭이’를 등장시켜 폭력성을 거둬내고, 흥부 개인이 부자가 되는 이야기를 나눔의 서사로 탈바꿈 시킨다. 그뿐만이 아니다. 흥부와 놀부의 서사에서는 형과 동생이 각각 욕심 많은 심술쟁이와 한없이 착한 사람으로 정형화 되어있다. 헌데 객석의 어린이들 중에는 형들과 동생들이 섞여 있다. 전통적인 서사를 그대로 무대에 가져올 경우, 객석의 형들은 자신과 동일화 할 수 있는 등장인물이 없어 낭패감을 느낄 수 있다. <말하는 원숭이>는 이 문제를 해결했다. 착한 동생은 심술궂은 형에게는 동생이지만 원숭이에게는 형이 된다. 즉, <말하는 원숭이>를 보면서 객석의 동생들은 원숭이와 착한 동생에 대해 동일시를 느낄 수 있고 객석의 형들은 원숭이의 착한 형에게 동일시를 느끼면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아동의 감수성에 민감하게 호응하여 더욱 재미있고 교육적인 서사로 재창작한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를 <말하는 원숭이>는 판소리의 기법과 다양한 악기를 활용하여 실감나게 전달했다. 공연 시간의 배분에서도 아동의 연령적 특성을 세심하게 고려하여 공연의 몰입도를 한껏 끌어 올렸다. 극을 시작하기에 앞서, 워밍업과 ‘이야기상자 놀이’를 배치하여 신나는 놀이를 통해 국악과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증진시키는 방식으로 재미와 교육적 효과를 동시에 끌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특히 천으로 만든 병풍을 세워놓은 듯한 무대의 갈라진 틈 사이를 활용한 배우들의 등・퇴장과 그 너머로 불쑥불쑥 출현하는 해와 달, 그리고 이야기 상자를 활용한 찾기 놀이 등, 이 공연은 끊임없는 돌발성을 연출하여 한순간도 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관객의 참여를 끌어내는 연출적 재치를 발휘하고 익히 알려진 민요풍의 노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객석의 흥을 고조시켰다.
다만, 원숭이의 죽음이 갖는 비극성에 대해서는 재고해 볼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객석에 환희를 안겨주던 말하는 원숭이의 갑작스런 죽음은 어린 관객들에게 커다란 슬픔과 열패감을 안겨준다. 더구나 원숭이의 죽음은 가학성의 문제도 여전히 안고 있다. 이 공연에서는 원숭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형(놀부)의 폭력적인 학대 행위가 무대 위에 가시화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형(놀부)의 무대 행동은 무대 뒤에서 이루어지는 가학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만약 원숭이가 놀부의 학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발적인 ‘단식’에 의해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면 어땠을까? 가학성의 위험을 피해가면서 원숭이의 주체적인 저항성을 돋보이게 하고, 더불어 원숭이의 죽음에 대한 아동들의 슬픔도 상당 부분 경감되어 극장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을 것이다.
K-Pop, K-드라마, K-푸드 등, K-컬쳐가 글로벌 문화지형에서 급부상하면서 이제 우리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으로 각광 받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특히 소리극은 그 형식이 개방적이어서 진화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게 열려 있다. 무엇보다도 서울남산국악당은 공연장과 조직의 특성상 소리극을 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는 단체이다. 그런 점에서 향후 남산소리극축제에 대해 기대를 걸어본다.
※ 이 글은 <굿스테이지> 6월호에 게재한 글을 수정・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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