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포지엄(비평워크샵)

[2025 봄 비평워크숍(수강생 비평문)]원칙은 어떤 '원칙'으로 만들어지는가 <원칙>

연극평협 2026. 1. 18. 19:38

원칙은 어떤 ‘원칙’으로 만들어지는가

 


권서의

 


원칙은 우리가 속한 사회 속에서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 기준을 넘어가면 더 큰 자유 를 누릴 수 있지만, 동시에 그에 따른 책임이나 대가도 감수해야 한다. 반대로 원칙 안에 머 무른다면 일정한 안전과 질서는 유지되지만 누군가의 자유가 제한될 염려를 배제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사회 규범에 반(反)하는 것이라기보다 사회의 흐름에는 벗어나지 않으 며 원칙에도 속하지 않는 사각지대를 의미한다. 연극 <원칙>(귀융캉 작, 장희재 번역, 강훈구 각색, 이준우 연출, 2025.05.23. ~ 2025.06.01., 서울연극창작센터)은 이처럼 안전함을 보장하 지만 생활의 실증을 담지 못하는 양면성을 ‘교장실’이라는 공간으로 이미지화하여 지적한다.


탁상 위의 원칙, 책상 밖의 현실
<원칙>은 교장과 교감의 대비를 통해 ‘원칙’과 ‘현실’의 거리감을 보인다. 교장은 임용고시를 본 적도 없으며 가르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지만 행정업무에는 탁월하다. 교장이 운영하는 학 교는 ‘청소년들의 공간’이라기보다 청소년을 “보호”해야 하는 공간이다. 그와 동시에 사회에서 바라보는 보수적인 시선과 그 기대에도 부합해야 한다. 따라서 그의 원칙은 학생들의 실제 생 활을 고려하지 않은 탁상공론에 머물러 있다. 

예를 들어, 체육복을 입지 않으면 운동장 사용을 금지하는 규칙은 질서유지를 위한 장치로 보인다. 하지만 이 규칙을 따라야 하는 학생들의 실제 생활을 보면, 10분 남짓 되는 쉬는 시 간 안에 환복을 두 번이나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동반된다. 이처럼 단정함과 체계만을 중시하 는 원칙은 학교 구성원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상태로 이상적인 것만 추구한다. 다시 말하자면, ‘원칙’은 현장의 경험을 배제한 채 소수 기득권 관점에 기초한 것이며, 다수의 실제를 포괄하 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반면 교감은 원칙의 경계에서 학생과 교사의 실제 삶을 반영하고자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 의 교육철학과 운영방식이 얼마나 원칙에 근거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생활의 현실성 은 갖추고 있다. 행정업무만을 기준으로 본다면 교감은 원칙에 충실하지 않다. 그래서 저평가 되지만 30여 년간 학교에 몸담아온 그는 누구보다 학교의 생태계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인물 이다.
이처럼, 연극 <원칙>은 문서와 행정이라는 ‘형식’과 기록되지 않지만 실질적인 것들의 충돌 을 교장과 교감을 통해 사각지대를 조명하면서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교장실, ‘원칙’의 시각화
교장의 원칙 강조는 결벽증에 가깝다.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허용하지 않으며, 규정 밖의 행 동을  하는  사람은  통제와  교화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원칙은  원칙”이라고  강조하는  교장의 태도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원칙은 어디에서부터 만들어진 것 인가?’, ‘원칙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질문은 무대 공간 구성과도 연결된다.
교정을 제외한 인물들은 무대의 통로와 윗층, 무대 밖까지 넘나들며 서사를 확장해 나간다. 반면 교장은 대부분 조명으로 한정된 ‘교장실’에 머문다. 다시 말하자면 다른 인물들은 ‘무대’ 라고 인식하는 공간 바깥까지 오가지만 교장의 동선은 ‘무대’에만 국한된다. 이러한 공간과 동 선은 단순히 ‘교장’과 ‘교장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장이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세계의 폭, 다시  말해  그의  시야와  사고의  한계를  상징한다.  그는  이  공간을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외부 세계의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이 설정한 규칙과 질서 안에서만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교장실 은 그가 학교를 바라보는 유일한 창이자 통제 가능한 공간이기도 하다. 결국 ‘무대’에 국한된  교장실은 교장이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제한함과 동시에 현실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수용하 기 어려운 인물임을 나타낸다. 
흥미로운 점은 교장실이 학교라는 공동체의 중심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좁은 공간이 라는 사실이다. 이는 원칙 또한 사회 규범의 중심에 있으나 현실의 다양성과 유동성을 완벽하 게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하는 지엽성을 내포한다. 이처럼, <원칙>은 교장실이라는 제한된 공 간을 통해 사회 중심에 있으나 가장 좁은 영역인 ‘원칙’의 아이러니를 담아낸다.


미니멀한 무대로 구축한 서사
<원칙>은 오브제 활용에 있어 절제된 방식을 선택했다. 이런 점에서 미니멀하다고 볼 수 있겠 으나, 공연의 전체 이미지는 단조롭지 않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배우들은 극장의 통로와 계 단,  윗층,  무대  바깥,  객석까지  활용하여  극장의  구조를  드러냄과  동시에  ‘무대’라는  공간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배우들의 동선을 통해 확장된 무대는 자칫 공허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여백은 배 우들의 연기로 채워진다. 인물 사이에서 생기는 미묘한 균열과 변화, 이를 통해 생성되는 밀 도와 긴장감은 더 넓어진 무대를 조금씩 채워나간다. 단조로워 보이는 무대 구성은 오히려 배 우의 연기와 공간 자체에 대한 집중을 이끌어 내어, 담백한 이미지에 서사를 담는다.

 


원칙이라는 단어는 양면성과 사각지대를 내포한다. 그리고 <원칙>은 현실과 어떻게 충돌하고 단절을 만들어내는지  그려낸다. 교장과  교감이라는 두 인물의 대비, 교장실이라는  폐쇄된 고 안, 그리고 최소한의 오브제를 활용하면서 구축된 서사는 관객으로 하여금 ‘원칙의 기준은 무 엇인가’라는 질문을 만들어낸다. <원칙>은 제도와 현실, 행정과 삶, 기준과 그 밖에 있는 것들 의 간극을 드러내면서 우리가 그 안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되묻는다. 그리고 그 답은 극 의 말미에 교장과 교감이 배드민턴을 치는 장면을 통해 ‘원칙은 삶에 반하지 않는’다는 주제 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