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문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난 1977년생 티아고 호드리게즈(Tiago Rodrigues)는 배우이면서 극작가이고 연출가이다. 1인 3역을 소화하는 그를 무대에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바로 2024 SPAF(서울국제공연예술제) 해외 초청작인 연극 <바이 하트>(티아고 호드리게즈 작·연출·출연, 대학로극장 쿼드, 2024.10.18.~20)에서이다. 그는 스무 살 무렵부터 극단에 소속되어 연극 작업을 했으며 이 시기에 극작법이나 공동창작 작업을 훈련받았다고 한다. 배운 것을 바로 실험해 볼 수 있는 환경은 예술가들에게 자신만의 예술창작 방식을 다질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호드리게즈가 경험한 것들은 시간이 흘러 연극 <바이 하트>를 낳을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2013년 리스본에 있는 마리아 마토스 극장에서 초연하고 지금까지 세계 곳곳을 순회하며 공연한 연극 <바이 하트>는 호드리게즈의 매우 사적인 가족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이 극은 한 개인의 사적인 기억이 전체주의 정권에 저항한 작가들의 글이나 일화와 얽혀 어떻게 역사적인 기억의 의미로 확장되는지를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티아고 호드리게즈를 예술가로 성장시킨 자양분이 무엇이었는지도 알게 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그의 극작법과 공동창작 작업 방식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극이기도 하다.
열 명이 시를 외워야 완성되는 연극
극장에 들어서면 공연 시작 전에 이미 등장한 티아고 호드리게즈가 흰색 바닥으로 된 무대 중앙에 놓인 스툴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입은 그는 미리 연극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배우처럼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고 아주 편안한 자세로 관객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그가 앉은 왼편에는 의자 네 개, 오른편에는 의자 여섯 개가 놓여 있다. 빈 의자 열 개는 등받이가 있는 서로 다른 모양으로 관객석을 보고 앉을 수 있도록 한 줄로 놓여있다. 무대 중앙 뒤편에는 영어 해석 자막용으로 사용하는 커다란 스크린이 하나 달려있고, 무대 가장 앞쪽에는 책이 담긴 나무 상자 여섯 개가 두 개씩 포개어져 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그는 관객을 향해 의자에 앉을 열 명의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을 건넨다. 열 명이 없으면 연극은 시작할 수 없고, 그가 제시하는 텍스트를 열 명이 모두 외워야 비로소 극이 끝난다고 한다. 처음부터 호기심과 긴장감을 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설명으로 이 연극이 관객 참여형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영어에 능숙한 관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극이 난항을 겪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그러나 곧 한 명의 남자와 아홉 명의 여자가 자진해서 무대로 올라갔다.
열 명의 사람이 의자에 앉으면 조명이 조금 어두워지고 본격적으로 극이 시작된다. 조명은 공연 내내 완전히 암전되지 않는다. 이것은 이 연극이 완성된 대본으로 진행되는 전통적인 극이 아니라는 것과 무대와 관객석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호드리게즈는 1919년 태생인 친할머니 깐디다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이 극은 노화로 점점 시력을 잃어 책을 읽을 수 없게 된 할머니와 호드리게즈 사이에 있었던 실화가 바탕이기에 할머니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면서 중심 사건이기도 하다. 그는 할머니가 아들 세 명을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나 한 명은 전쟁으로 또 한 명은 차 사고로 잃고 그의 아버지만 살아남아 기자가 되었다는 아주 개인적인 가족사를 말한다. 할머니는 열 살에 정규교육을 멈추었지만 책 읽는 것을 사랑했다. 요양원에서 지내면서 손자가 가져다주는 책을 읽던 할머니는 더는 글을 읽을 수 없게 되기 전에 기억 속에 오래 남을,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단 한 권의 책을 손자에게 부탁한다. 그의 설명으로 실재 인물인 할머니와 허구인 극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을 상상하고 그림을 그려보려면 구체적인 에피소드와 상징이 필요한 법인데 호드리게즈는 첫 시작부터 할머니의 삶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관객이 할머니에게 친밀감을 느끼도록 유도한다.
시력을 상실하기 전 할머니가 마음으로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책을 골라야 하는 사명은 그에게 엄청난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가 고심해서 선택한 책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이다. 무대로 올라온 관객 열 명이 외워야 할 시는 할머니가 외웠을 셰익스피어 소네트 30이다. 이 시는 총 14행으로 4행은 열 명이 함께 외우고 나머지는 각각 혼자서 암기해야 한다. 호드리게즈는 14행을 다 알려주지 않고 치밀하게 구성한 이야기들과 적절히 섞어서 진행한다. 호드리게즈는 특별히 한국어로 외운 14행의 소네트를 마치 합창단의 지휘자처럼 리듬과 호흡을 중요시하면서 열 명이 암기하도록 아니, 노래하도록 반복해서 연습시킨다. 그가 열 명에게 시를 암송시킬 때 먼저 자신이 외운 행을 말하고 관객이 따라 하도록 하는데 행이 끝날 때마다 매번 상당히 과장되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반복해서 낸다. 이것은 ‘기억한다는 것은 곧 숨이다’라는 걸 상징하는 행위로 보인다. 제77회 아비뇽 연극 축제 때 마크 블랑셰가 진행한 인터뷰에서 호드리게즈는 ‘연극을 통해 죽은 자와 소통할 수 있다는 하이너 뮐러의 말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즉 호드리게즈가 시를 외우며 들이마시는 과장된 숨은 이미 죽어 사라진 할머니와 셰익스피어의 숨을 동시에 무대로 불러오는 제의적인 의식인 것이다. 기억은 곧 호흡이기에 기억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연극 <바이 하트>는 관객 열 명이 누구냐에 따라서 극의 질감과 소요 시간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나 관객에 의해서 이 극의 주제나 결말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극은 열린 구조가 아닌 치밀하게 계획한 길로 나아간다. 단지 열 명이 시를 외우려고 고투하는 장면이 매번 다른 감정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10월 18일 금요일 저녁 7시 30분 공연에서는 의자에 앉은 열 명 모두 적극적으로 소네트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한 젊은 여자는 소네트 6행인 ‘메말랐던 내 눈은 눈물에 잠기네’라는 구절을 잘 기억하려고 손으로 눈을 하나씩 가리고 마치 눈물을 흘리듯 두 손을 동시에 내리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암송했다. 이 장면은 즉흥극의 묘미로 관객에게 미소를 짓게 했다. 호드리게즈는 여자가 보여준 창의적인 손동작이 아름답다고 감탄하면서 여자가 암송할 때마다 이 행위를 함께 하도록 부탁했다. 열 명이 시를 암기할 때마다 관객석에서도 시를 읊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이것은 열 명이 무대에서 느끼는 강박과 긴장감을 관객도 함께 느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연 내내 직간접 경험이 무대와 관객석에서 동시에 일어나도록 계획한 호드리게즈의 연출력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사랑에 빚진 자의 무대
삶은 곧 기억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의 삶은 기억으로 소환되기에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이기에 기억은 온전하게 보존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이가 함께 기억한다는 건 단단해지고 강해진다는 걸 의미한다. 호드리게즈가 연극에서 소환하는 작가들은 모두 ‘기억하기’와 연관되어 있다. 그가 입은 흰색 티셔츠 뒷면에 얼굴까지 새겨서 관객에게 보여주는 문학 비평가 조지 스타이너(1929~2020)는 극에서 여러 번 언급된다. 호드리게즈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시나 산문에 대한 헌사는 외우는 것이다’라는 스타이너의 말을 강조한다. 호드리게즈는 할머니에게 줄 책에 대한 고심으로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였던 스타이너에게 편지를 보냈다며 당시 썼던 편지글을 낭독한다. 그런데 어떤 부분이 실화이고 허구인지 모호하다. 그가 슬쩍 이 극은 대본이 있다고 말하지만, 실재 인물인 자신의 할머니를 내세웠기에 전체 내용이 모두 사실인 것처럼 믿게 된다.
레이 브래드베리(1920~2012)가 1953년에 쓴 『화씨 451』은 책이 금지된 미래가 배경인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화씨 451(섭씨 233)은 책이 불타기 시작하는 온도를 의미한다. 이 소설은 같은 제목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은 이 소설의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기도 하다. 호드리게즈는 소설 『화씨 451』의 한 대목을 마치 소설 낭독극처럼 펼쳐낸다. 그는 의자에 앉은 사람들 몇 명에게 소설 속 인물의 이름이 타이포그래피로 적힌 책을 하나씩 주고 펼치고 있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손을 뻗어 책에 쓰인 그 인물의 이름을 가리킨다. 호드리게즈는 틈틈이 의자에 앉은 열 명에게 자신이 언급하는 작가나 소설 속 인물을 설명할 때마다 그 이름이 적힌 책을 펼쳐 들게 하면서 이 연극에 참여시킨다.
호드리게즈는 그가 입은 흰색 티셔츠 앞면에 얼굴을 새긴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일화도 꺼낸다. 소설 『닥터 지바고』로 잘 알려진 옛 소련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그는 열 명이 외워야 하는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오래전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스탈린 독재를 반대한 그가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을 때였다. 작가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그에게 자신들이 기억할 말을 남겨달라고 했다. 그는 30을 외쳤고 ‘외우고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파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가 외친 30이 그가 번역한 셰익스피어 소네트 30이라는 것을 알았다. 호드리게즈가 이 장면을 설명할 때 문득 말과 글을 모두 잃었던 일제강점기가 생각났다. 그 시절에도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면 안 되는 비밀문서를 누군가 암기하고 바로 찢거나 태우고 입으로 삼켜서 없앤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호드리게즈는 이 일화를 말한 뒤 바로 열 명에게 소네트를 암기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는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기억은 저항일 수 있다’는 의미를 스며들게 한다.
러시아 시인으로 수용소에서 사망한 오시프 만델시탐(1891~1938)의 일화는 호드리게즈가 연극 <바이 하트> 형식에 가장 큰 도움을 받은 듯하다. 만델시탐의 아내는 스탈린 독재에 항거한 남편이 체포된 뒤 부엌에서 열 명의 사람에게 남편의 시 한 편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소문이 퍼졌고 60편의 시를 600명의 사람이 기억하게 되었다. 국가가 금지하는 시를 암기함으로 시는 가장 안전했고, 가장 심오한 형태인 인간의 영혼으로 하는 출판을 한 셈이 된 것이다.
문학 비평가인 조지 스타이너는 ‘문학비평은 사랑을 빚진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명백하면서도 또한 신비한 방식으로, 시나 희곡이나 소설은 우리의 상상 활동을 사로잡는다. 작품을 집어 들었을 때의 우리와 내려놓았을 때의 우리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여기서 문학비평을 다른 말로 바꾸어 ‘연극은 혹은 연극비평은 사랑을 빚진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로 시작해도 무방할 것이다. 티아고 호드리게즈를 키운 건 할머니의 사랑과 책이었을 것이다. 예술가로 성장한 그는 전 시대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에 빚진 자이기도 하다. 그는 그가 받은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 사랑에 빚진 자의 무대는 사랑과 헌사로 가득했다.
기억하기의 성만찬
이제 연극의 하이라이트를 말할 때가 왔다. 호드리게즈는 열 명의 사람이 암기한 14행의 소네트를 성경의 에스겔서를 언급하면서 먹으라고 말한다. 에스겔서에는 신이 선지자에게 준 말씀, 정확히 말하면 예언의 문장이 적힌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도 빼앗지 못하도록 기억하고 품으라는 의미가 먹는 행위로 상징된다. 그는 셰익스피어를 먹을 기회를 주겠다면서 리스본의 제과점에서 직접 주문해서 만들어왔다는 네모난 전병을 열 명에게 나누어준다. 교회에서 성만찬 때 먹는 것과 비슷한 전병 안에는 셰익스피어 소네트 30이 적혀있다. 그는 전병에는 글루텐이 들어있는데 셰익스피어 책에도 글루텐이 들어있다고 유머를 던진다. 빵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글루텐은 이 극에서 아주 적절한 은유이다. 집단 암송으로 기억은 충분히 부풀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제 시가 몸이 되는 성만찬 예식이 무대에서 벌어진다.
호드리게즈는 열 명이 전병을 다 먹었을 때 마지막까지 숨겨둔 비밀을 하나 꺼낸다. 그는 할머니의 몸이 점점 약해졌을 때 아버지와 친척 열 명을 모아 이벤트를 기획했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읽고 기억한 소네트를 열 명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할머니는 침대에 누워 셰익스피어 소네트 30을 힘들게 말했고, 그곳에 있던 열 명이 그 시를 암송했다. 이 연극이 왜 관객 열 명이 필요했는지 밝혀지는 부분이다. 그는 할머니가 시를 가르쳐준 현장을(이것이 실제인지 허구인지 모호하지만) 무대화한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는다. 셰익스피어 소네트 30이 적힌 작은 쪽지다. 우리의 현실은 견고하지 않기에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책을 읽을 수 있고 위대한 정신을 마음에 새길 수 있다고 연극 <바이 하트>는 다시 한번 잊지 말라고 알려주는 듯하다.
감미롭고 고요한 명상에 잠기며
지난 옛일을 추억해 본다
내가 찾던 많은 것은 어디로 갔나
귀한 시간 낭비한 비애를 애탄하노라
죽음의 밤에 숨은 소중한 친구여,
메말랐던 내 눈은 눈물에 잠기네
오래전 끝난 사랑은 다시 슬퍼하고
사라져 버린 아픔을 탄식하노라
지난날의 슬픔이 가슴을 후벼 파고
젖어 들어 그 사연들 무거워지니
전에 치른 슬픔 하나 하나 헤아려
아니 한 듯 새로이 아파하네
친구여, 그대를 생각하면
상처는 아물고 슬픔은 끝나도다
비록 전병은 아니었지만 종이에 적힌 시를 먹는다. 공연의 감동이 오래 기억되기를 바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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