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봄 비평워크숍(수강생 비평문)] 몸으로 쓴 서사시 - <인정투쟁: 예술가 편>
최성문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소통과잉의 시대를 산다. 인터넷 혁명은 몸이 사라진 타인을 친구로 두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시대는 얼굴 없는 친구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권력을 가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철학자 한병철의 주장처럼 ‘디지털 소통은 점점 더 공동체 없는 소통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소통과잉의 시대가 낳은 소통결핍은 몸이 없는 아우성이 넘쳐나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시대에 연극 <인정투쟁; 예술가 편>은 절실하게 너를 부른다. 몸이 사라진 친구가 아닌, 서로의 몸짓이 의미 있는 눈짓이 될 유일한 존재, ‘너’를 부른다. 김춘수의 시 <꽃>을 여러 번 낭독하면서 간절하게.
장애의 몸 그 자체가 캐릭터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물리적 심리적 장애물을 없앤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공연은 이제 낯설지 않다. 장애인 연극 전문극장도 생겨났고, 장애인이 직접 출연해 장애인 서사를 보여주는 이야기도 점점 더 늘고 있다. 하지만 연극 <인정투쟁; 예술가 편>은 배우 전원이 장애인이지만 장애 현실이나 고통 혹은 극복을 다룬 장애연극이 아니다. 장애인 서사를 앞세우지 않는다는 게 이 극이 가진 가장 큰 덕목이 아닐까. 이 작품은 장애연극을 표방하지는 않지만, 장애인의 몸이 극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 뇌병변이나 언어장애 등 장애를 가진 배우의 몸 그 자체가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되기 때문이다. 연출가가 배우들을 장애인으로 선정한 것은 처음부터 언어와 움직임에 제한을 두기로 설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극은 몸이 곧 성격이며, 몸이 곧 언어가 된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외치는 독백은 비장애인의 몸이 외치는 독백과는 전혀 다른 울림을 던져준다.
2019년 초연된 연극 <인정투쟁; 예술가 편>은 2017년 제8회 두산연강예술상과 2020년 제56회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받은 이연주(극단 전화벨이 울린다 대표) 작, 연출 작품이다. 2024년 두산인문극장(인간과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문학적, 예술적 상상력이 만나는자리)의 ‘권리’라는 주제 아래 5월 28일부터 6월 15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다시 막이 오른 이 극은 초연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 우선 강희철 배우가 고인이 되어 출연자가 7명에서 6명으로 줄었고, 한 면이었던 무대를 네 면으로 바꾸었다. 무대는 마치 사각의 링처럼 관객석을 배치해서 배우들이 모서리 부분 네 곳에서 자유롭게 등퇴장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연주 연출가는 “대본을 다시 읽으면서 한 방향보다는 서로를 향하는 과정으로 집중하게 되었고, 각자의 신체감각을 통해 서로를 감각할 수 있는 무대가 될 수 있도록 모든 방향의 객석으로 열린 무대가 만들어졌다”라고 이번 공연의 무대를 설명한다. 열린 무대형식에 걸맞게 배우들의 모든 대사는 한글 자막으로 처리되고, 무대 해설은 실시간 음성언어로 나온다. 이 극에서 주제와도 같은 김춘수의 시 <꽃>은 남녀가 번갈아 가며 여러 번 낭송된다. 윤복희의 노래 <여러분>과 이은하의 노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그리고 팝송 <My way>와 <The show must go on>등 각 장면의 주제를 암시하는 노래들이 대사와 함께 이어지기에 연극은 마치 한편의 라디오 방송극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작품의 첫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바라본다면 그것으로 연극이 시작되기에 충분하다’라는 피터 브룩의 말이 자막으로 나오면서 동시에 자동으로 작동하는 빈 휠체어 한 대가 빈 무대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른다. 피터 브룩의 언어로 관객은 빈 휠체어가 무대에서 벗어날 때까지 그 움직임을 응시한다. 아니, 경청한다. 이 연극은 움직임도 하나의 언어이기에 몸짓은 언제나 의미로 발화한다.
연극은 3막 구성으로 ‘나, 너, 그’의 형식으로 진행되며 예술가로 인정받으려는 투쟁이 이어진다. ‘나, 너, 그’의 형식은 극이 1인칭, 2인칭, 3인칭으로 시점이 달라진다는 걸 알 수 있다. 등장인물들은 극 안과 극 밖을 오가며 마치 1인 2역처럼 배우 역할과 비평가(혹은 본래의 자아) 역할을 소화한다. 극에서 배우 지망생인 여섯 명의 자아는 마치 한 명인 것처럼 각각의 ‘나’가 인정투쟁의 독백을 약간의 시간차를 두며 쏟아낸다.
예술인패스는 예술가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복지제도이다. 그러나 예술인 활동 증명이 필요한 순간 이것은 시스템이 된다. 등장인물들은 예술가라는 걸 증명하라는 컴퓨터 시스템 앞에서 멈춰 선다. 이 증명 시스템은 꼭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각자 삶의 현장에서 당면하는 장애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극의 첫 부분인 이 장면에서 어떤 이는 인물이 어떻게 이 상황
을 해결해 나갈지 기대하는 마음을 가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역경을 딛고 싸워서 승리하는 영웅서사에 길들어 있으며, 또 그런 이야기에 쉽게 감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극복하는 인물을 그리지 않는다. 사실 장애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는 극복이기 도 하다. 배우들은 좀 전까지 자신이 연기했던 무대에서 빠져나와 그들이 직접 몸으로 써내려간 극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요즘도 역경을 이기고 극복하는 인물이 있나? 너무 올드하다.”
인물이 던지는 올드하다는 말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의미처럼 들리기도 한다.
여섯 개의 독백이 담긴 서사시
연극 <인정투쟁; 예술가 편>은 한편의 서사시이다. 따라서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로 완결되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이 극은 여섯 명이 말하는 여섯 개의 독백이며 시이다. 이 작품이 시로서 가장 멋지게 발화하는 지점은 1막에서 예술가 활동을 증명받고자 여섯 명이 배우 오디션을 치르는 부분이다. 배우 지망생과 현역 배우들의 연기 훈련을 위해서 전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최형인 교수가 엮은 책 <배우,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백 세 개의 모노로그>는 여러 연극 대본에서 발췌한 백 세 개의 독백이 담겨있다. 여섯 명의 배우는 1990년도에 초판을 찍고 2024년 현재까지도 발행되는 이 책에 실린 독백을 자신만의 호흡으로 1부터 시작해 103까지 숫자를 외친다. 오디션을 치르는 장면을 독백을 읊조리는 서사로 풀지 않고 단지 숫자를 말함으로써 이 장면은 그대로 시가 된다. 여섯 명이 모두 103의 숫자를 다 외쳤을 때 103번이나 치른 오디션에서 모두 떨어진 배우의 절망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기호의 언어가 감정으로 다가오며 이미지가 되는 순간을 잘 형상화한 장면이다. 이것이 바로 시가 아니겠는가.
2막에서 인물들은 ‘나’에서 ‘너’로 시점이 이동한다. 김춘수의 시 <꽃>에 나온 것처럼 ‘나’는 ‘너’의 의미가, ‘너’는 ‘나’의 의미가 되고자 ‘나’에서 ‘너’가 된 것일까. 이제 ‘너’가 된 인물들은 과거로 돌아가서 예술개론 수업 시간을 재현한다. 선생님은 이미 죽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남긴 예술에 대한 담론을 말하고, 학생들은 그 말을 마음에 새긴다. 학생들은 끊임없는 반복과 연습을 외치며 배우로 태어난다. 하지만 2막부터는 명확하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아니, 어떤 시로 형상화되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게 느껴진다. 막이 바뀔 때마다 김춘수의 시 <꽃>이 낭독되면서 이 극은 이 시와 연관되어 진행된다고 나침판처럼 말해주지만 1막에서 백 세 개의 독백을 숫자로 외쳤던 장면처럼 명확한 이미지로, 즉 꽃으로 피어나지 않는다. ‘그’가 되는 3막에서 이 문제는 조금 더 깊어진다. 1막에서 시작한 예술인 증명 투쟁에서 3막은 예술의 종언을 외치며 무대를 거부하는 관객의 서사로 방향이 달라지는데 왜 관객이 예술을 거부하는지 쉽게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김춘수의 시 <꽃>과 긴밀하게 연결된 피터 브룩의 말처럼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 없는 연극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이야기하는 것일 테지만, 관객이 이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구성이 아닐까 싶다. 좀 더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바라볼 수 없거나 바라볼 수 없게 하는 나와 너의 관계성을 그려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사실 일상에서 응시를
방해하고 흐트러뜨리는 건 지루함이나 반복이나 자기과잉 등의 이유에서 벌어지지 않는가. 3막의 마지막은 1막에서 언급했던 ‘어떤 사람이 지나가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바라본다면 그것으로 연극이 시작되기에 충분하다’라는 피터 브룩의 말이 다시 나온다. 배우들은 무대 는 관객이 있어야 하기에 고맙다는 말로 정리를 하며 진심을 담아 끝인사를 하는데 어쩐지
극이 급하게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배우의 연기가 모두 끝났을 때 또 한 번 시로 환원될 수 있는 부분이 남아있다. 그러나 3막의 형상화가 다른 방향으로(이것은 전적으로 비평의 입장에서 볼 때) 나아감으로 깊이 감동할 수 있는 부분이 아쉽게 마무리된다. 이 연극은 영화의 마지막처럼 제작진의 이름이 스크린에 자막 영상으로 올라간다. 한 편의 연극을 위해 이토록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는 게 놀랍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침묵의 시간이 어쩐지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제작진의 이름이 시가 되어 날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이 감정으로 환원되어 이미지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극에서 등장인물들은 분명 배우이지만 예술활동 부재로 예술인 증명을 받을 수 없어 극장 청소와 자막 오퍼레이터로 취업한다. 생각해 보면 자막 오퍼레이터도 예술가가 아닌가. 단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일하기에 우리는 그가 예술가라는 걸 잠시 잊을 뿐이다. 만일 무대에 서지 않지만 예술가로 존재하는 자막 오퍼레이터의 일상이 3막에서 어떤 발화점을 가지면서 심화되었다면 연극 <인정투쟁; 예술가 편>을 위해 애쓴, 자막으로 존재하는 예술가들의 이름은 시가 되어 관객의 가슴을 울렸을 것이다.
연극은 막을 내렸다. 초연 이후 5년 만의 외출이다. 그러나 연극 <인정투쟁>은 끝나지 않은 듯 느껴진다. 이제 겨우 ‘예술가 편’만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들기에 또 다른 편을 기대해 본다. 어떤 편이 나오더라도 인정투쟁은 무대에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무대 앞과 뒤에서 존재하는 이들을 누군가가 봐줄 때야 비로소 소통되며 극은 완성될 것이다.
초연: 2019.10.29(화)~11.16(토)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기획·제작: 두산아트센터
작, 연출: 이연주
드라마터그: 김슬기
배우: 강보람 강희철 김원영 김지수 백우람 어선미 하지성
재연: 2024.5.28(화)~6.15(토)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기획·제작: 두산아트센터
작, 연출: 이연주
드라마터그: 김슬기
배우: 강보람 김원영 김지수 백우람 어선미 하지성
접근성 제공사항: 음성소개/음성해설/한글자막해설/휠체어석/안내보행/
문자소통(필담)/수어통역,터치투어(일부회차)